읽고본느낌

강신주의 감정수업

샌. 2019. 1. 15. 12:29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특히 다양한 감정 변화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동물은 식욕과 번식욕에 따른 몇 가지 감정이 전부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와 욕망에 따른 무수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산다. 인간의 이성의 동물이면서 감정의 동물이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부정되기까지 했다. 마치 몸이 멸시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압하면 행복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샘솟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다는 기쁨을 맛본다. 환희나 영광만 아니라 슬픔, 비애, 절망 등의 감정도 우리에겐 소중하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철학자 강신주 선생이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하고 설명을 붙인 책이다. '감정의 철인'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기본으로 깔고, 그 감정이 드러난 문학 작품을 소개한다. 마지막에는 '철학자의 어드바이스'가 나온다. 선생의 마무리 발언이다. 문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인간을 탐구해 나간다.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선생이 나눈 인간의 48가지 감정은 다음과 같다.

 

비루함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자긍심 /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경탄 / 사랑이라는 감정의 바로미터

경쟁심 / 서글프기만 한 사랑의 변주곡

야심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 /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대담함 / 나약한 사랑을 용사로 만드는 비법

탐욕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반감 / 아픈 상처가 만들어 낸 세상에 대한 저주

박애 /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연민 /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회한 / 무력감을 반추하도록 만드는 때늦은 후회

 

당황 / 멘붕, 즉 멘탈붕괴와 함께하는 두려움

경멸 / 자신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서글픔

잔혹함 / 사랑의 비극

욕망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동경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멸시 / 사랑이라는 감정의 막다른 골목

절망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음주욕 /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발버둥

과대평가 / 사랑의 찬란한 아우라

호의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환희 / 원하는 것이 선물처럼 주어질 때의 기적

영광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감사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겸손 /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분노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될 때까지

질투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적의 /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허망한 전투

조롱 / 냉소와 연민 사이에서

욕정 / '프레스토'로 격하게 요동치는 영혼

탐식 / 자신의 동물성을 발견할 때

두려움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동정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공손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미움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되거나

 

후회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끌림 / 사랑으로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

치욕 / 잔인한 복수의 서막

겁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확신 / 의심의 먹구름이 걷힐 때의 상쾌함

희망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오만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소심함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쾌감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슬픔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수치심 /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복수심 / 마음을 모두 얼려 버리는 지독한 냉기

 

이 중에서 '야심(AMBITIO)'이라는 항목이 관심을 끄는데, 명예욕과 같은 의미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 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인간에게서 가장 강력한 욕망이 명예욕이 아닌가 생각한다. 식욕, 성욕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다. 다른 말로 인정욕구, 또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이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간. 삶은 한마디로 '인정 투쟁'이다.

 

손주를 보면 어른에게 이뻐 보이기 위해 하는 셈과 행동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다 자랐다고 별로 다르지 않다. 외피를 근사하게 가렸을 뿐, 속내는 여지없는 '날 바라봐 줘!'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라는 라캉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성인이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커서도 남의 인정에 징징댄다면 유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예욕에서 초월한 사람이 초인(超人)이다. 그 정점에 디오게네스가 있다. 정복왕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그가 한 말을 되새겨 본다. "나는 정복왕 알렉산더요. 필요한 게 뭐요?" "나는 개요.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 주시오."

 

최근에 어느 모임에서 갈등이 있었다. 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니, 무시당한 느낌이 제일 컸다. 이 역시 인정욕구의 늪이었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은 오직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왜 돈을 벌려 하는가? 간단하다. 돈이 많을 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그만큼 불완전하고 가련한 존재라는 뜻이다. 선생은 여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생이 쓴 '철학자의 어드바이스'을 옮긴다.

 

야심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특정 다수들로부터 시기와 관심, 그리고 찬양과 찬탄을 받으려고 한다. 나를 찬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찬양하기만 하면, 우리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도 보석으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창 시절을 한번 돌아보자. 다음과 같은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첫 강의를 듣자마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교수의 강의가 보잘것없다는 것, 심지어는 강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리포트를 제출하고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교수가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교수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이니만큼 훌륭한 사람이어야한다는 논리가 심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심이 강한 사람은 너무나 취약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칭찬을 해 주면 사족을 못 쓰는 아기와도 같다. 그러니까 강해 보여도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하고, 당연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자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전쟁이라고 할 때, 이렇게 '지피지기(知彼知己)'를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삶이나마 제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직급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야심은 더 커져만 간다. 그러면 진짜 위기가 다가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야심이 커질수록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심은 아카시아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야심은, 절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 속에 다른 수많은 감정들도 자기 결을 따라 제대로 자라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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