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밤 시골 사랑방에서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밤새는 줄 모르고 사설에 빠져든다. 낯선 동네와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줄거리를 예측할 수 없으니 긴장감도 높다.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이 그랬다.
<고래>는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2004년에 이 작품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유명세는 알고 있었지만 늦게서야 직접 읽어봤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진 영욕과 성쇠' - 소설에 설명된 구절대로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인생사를 그린 소설이다. 금복과 춘희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배경으로 깔린다.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해서인지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여성 이상의 초인적 존재로 설정된 금복과 달리 딸인 춘희는 벙어리면서 지능이 낮다. 금복은 온몸으로 세상에 맞서고, 춘희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순수한 세계에 산다. 그러나 둘 다 세파에 휘둘리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의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사람만 아니라 평대라는 무대도 결국 잿더미가 된다. 근대화와 그에 따른 인간 욕망의 결말이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소설 제목인 '고래'도 거대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인데 금복과 춘희 모두 세상과 동화하는 데는 실패한다. 욕이든 무욕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무자비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처절하게 짓이겨진다.
그런데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에게도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제 삼자의 자세로 냉정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특별한' 소설이라는 소개는 <고래>의 작법에 관계된 찬사 같다. 기존 소설과는 다른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듯 해 아쉽다. 어쨌든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