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일행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가을 햇살에 끌려 중간에 내렸다. 햇볕 잘 드는 작은 커피숍 창가에 앉아 기울어가는 오후의 도시 풍경과 함께했다. 빌딩 사이로 폭포수처럼 햇빛이 비치고, 보도에 떨어진 낙엽은 사람들 발걸음에 이리저리 쫓기고 있었다. 쓸쓸하지만, 그래서 넉넉해지는 흉내를 내보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넉넉한 쓸쓸함'이라는 제목으로 따스해지는 시다. 그러나 '넉넉한 쓸쓸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개와 힘든 길을 걸어야 했겠는가. 삶은 꽃길이 아니다. 삶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그 고독과 치열함이 우리를 위무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죽는 시늉 하지 말고 경박해지지 말자. 무엇보다 정직하자. 단맛이 날 때까지 고독에 깊어지자. 이 가을이 주는 엄숙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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