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금강경[14]

샌. 2020. 3. 8. 13:04

이 때, 이 가르침을 듣던 수보리 장로는 눈물 흘려 울었네. 깊은 가르침에 마음이 깨어 기쁨에 겨워 울었네. 장로는 부처님께 이와 같이 사뢰었네.


"드문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이렇게 깊은 가르침은 저는 지혜의 눈이 열린 뒤로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진실로 '참된 말씀이다'라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이 사람은 마침내 가장 드물고 으뜸 가는 공덕을 이루게 될 것임을 알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참된 말씀'은 '참된 말씀'이 아니기에 여래께서는 '참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믿고 깨달아서 삶으로 받아 지니는 일은 어렵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바른 가르침이 희미해진 먼 뒷날에도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듣고 믿고 깨달아서 삶으로 받아 지닌다면 이런 사람은 참으로 드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에게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고,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 또한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모습과 생각을 떠난 님, 이런 님이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수보리여, 여래가 말하는 '온전한 이룸'은 '온전한 이룸'이 아니라 '온전한 이룸'이라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욕됨에도 흔들림이 없는 참음, 이 같은 '참음의 온전한 이룸'도 '참음의 온전한 이룸'이 아니라 '참음의 온전한 이룸'이라 이름할 뿐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수보리여, 먼 옛날 가리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베어낼 때에도 내게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리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베어 낼 때 내게 만약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나는 반드시 화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여래가 참는 수행을 닦던 지난 오백 생애의 일을 환히 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도 나에게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모습과 생각을 여의고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모양에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고, 소리에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고, 냄새에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맛에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고, 느낌에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고, 생각의 대상에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야야 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어디에도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마음은 때때로 물들더라도 그 마음은 진실로 물들 것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래는 '보살은 마땅히 모습이나 생각에 물듦이 없이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온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이와 같이 나누고 이와 같이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모습은 모습이 아니고 모든 중생 또한 중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언제나 참을 말하고, 여래는 언제나 실다움을 말하고, 여래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합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언제라도 거짓을 말하지 않고, 여래는 언제라도 틀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깨달은 이 진리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만약 모습과 생각에 물든 마음으로 나누고 베푼다면 이것은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수보리여, 보살이 만약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으로 나누고 베푼다면 이것은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밝은 빛 속에서 가지가지 모습을 환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보리여, 오는 세상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가르침을 거뜬히 받아 지녀, 즐겨 읽고 절로 외운다면 여래는 깨달음의 큰 지혜로 밝게 알고 여래는 깨달음의 큰 지혜로 환히 지켜 볼 것이니, 이런 님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고 끝도 없는 크나큰 공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 금강경 14(생각을 여읜 평화, 離相寂滅分)

 

 

하필 이 시기에 치통이 찾아왔다.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통증 때문에 한밤중에 깼고, 진통제를 먹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치과에 가려 했는데 더는 참을 수 없다. 이빨 하나로 순식간에 평화가 깨진다. 이것이 인간이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견디며 <금강경>을 옮겨 적는다. <금강경>에서 제일 긴 분(分)이다. 가리왕와 찬디바리의 고사가 나오는데, 찬디바리는 팔과 다리가 베어지면서도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인욕 수행을 이어갔다. 화내고 원망하는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나 없는 나', 생각은 따라 한다지만 같은 중생은 과연 흉내조차 낼 수 있을는지.

 

"보살은 이와 같이 어디에도 물드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마음은 때때로 물들더라도 그 마음은 진실로 물들 것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때때로 물들더라도', 이 구절이 한겨울의 화롯불처럼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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