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도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몸을 바쳐 널리 베풀고, 낮에도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몸을 바쳐 널리 베풀고, 저녁에도 갠지스 강 모래알 수 만큼 많은 몸을 바쳐 베풀기를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두고 하더라도, 누군가 이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복됨이 저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이 가르침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이웃들에게 풀어 일러 주며 함께 나누는 사람이겠습니까?
수보리여, 간추려 말하면 이 가르침은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림으로 헤아릴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더불어 사는 삶에 마음 낸 이들을 위해 이 가르침을 말하고, 여래는 온전한 삶에 마음 낸 이들을 위해 이 가르침을 말합니다.
수보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거뜬히 받아 지녀 즐겨 읽고 절로 외우고 널리 이웃과 함께 나눈다면, 여래는 이런 사람을 환히 알고 여래는 이런 사람을 환히 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림할 수 없고, 잴 수 없고, 가없고, 헤아려 알 길 없는 공덕을 이룰 것이니, 수보리여, 위 없이 바른 여래의 깨달음은 이와 같은 님들이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작고 닫힌 가르침을 즐기는 이들은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에 얽매여, 이 가르침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이 가르침이 살아 있는 곳 어디라도 그곳은 모든 하늘중생과 사람과 아수라가 다 함께 우러러 공경하리니, 수보리여, 그들은 이곳이 바로 거룩한 탑임을 알아서 우러러 절하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꽃을 뿌리고 향을 흩뜨릴 것입니다."
- 금강경 15(가르침대로 사는 공덕, 持經攻德分)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삶으로 실천하느냐의 여부다. 알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 것이다. 깨달으면 반드시 삶으로 연결 된다. 부처님은 구체적인 삶을 강조하신다.
'강남 좌파'란 말이 있다. 자본주의가 주는 단맛을 향유하면서 의식은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평등을 말하면서 자신의 특권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기 위안을 위해 이미 넝마가 된 이념을 붙들고 있는지 모른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웃과 나누는 삶'은 그 분의 가르침에 국한된 것은 아니리라. 꽃을 뿌리고 향을 흩뜨리는 종교 의식도 아니리라.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로 돌아온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 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일까. 갠지스 강 모래알 수 만큼이나 아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