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여쭈였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이 가르침을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겠습니까? 또 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수보리여, 이 가르침은 '금강 같은 지혜를 이루는 길'이라 이름하십시오. 이와 같은 이름으로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십시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수보리여, 여래가 말한 '지혜를 이루는 길'은 '지혜를 이루는 길'이 아니라 '지혜를 이루는 길'이라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가 말한 가르침이 있겠습니까?"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없겠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 그 가없는 우주를 이루는 먼지들이 아주 많지 않겠습니까?"
"행복하신 분이시여, 참으로 많겠습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저 모든 먼지는 먼지가 아니라 다만 먼지라고 이름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저 모든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다만 세계라고 이름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서른두 가지 여래의 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모습으로 여래를 뵐 수 없겠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서른두 가지 모습은 서른두 가지 모습이 아니라 서른두 가지 모습이라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목숨을 바쳐 널리 베풀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 가운데서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삶으로 받아 지니면서 이웃과 함께 나눈다면 이 공덕이 저 앞의 공덕보다 더 뛰어날 것입니다."
- 금강경 13(바르게 받아 지니기, 如法受持分)
"<금강경>은 하나의 주제가 계속 변주되어 나오는 아름다운 교향악이다." 이 분(分)도 앞에 나왔던 말씀이 형태를 달리 하면서 재차 강조 된다. 도올 선생의 말처럼 <금강경>을 음송하면, 노래하는 입이나 듣는 귀나 감미로운 음악 속으로 젖어드는 것 같다.
'이름' 속에는 의미나 개념,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 인간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 이름을 짓고 사물간의 차이를 구별한다. 예를 들어, 삶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죽음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이름에 매몰되면 나중에는 이름이 세상을 규정해 버린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하면 망상이 된다.
"저 모든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다만 세계라고 이름할 뿐이다." 지혜, 여래의 가르침, 여래의 모습, 무한한 공덕 등이 변주되어 흐르는 운율이 아름답다. 그리고 이 모든 물줄기는 하나로 합쳐져 흐른다. "나는 나가 아니라 다만 나라고 이름할 뿐이다."
코로나19가 전국을 흔들고 있다. 코로나19에서 우리는 두려움, 애착, 적의 등의 감정에 휩싸인다. 바이러스 역시 우리 세계의 일부분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코로나19는 코로나19가 아니라 다만 코로나19라고 이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