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금강경[17]

샌. 2020. 4. 5. 14:53

그 때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여쭈었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합니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온 중생을 나 없는 행복으로 살아가게 하리라. 나는 온 중생을 나 없는 행복으로 살아가게 하되 한 중생도 그와 같이 살게 한다는 마음이 없이 다 그와 같이 살게 하리라."

 

왜 그렇겠습니까? 수보리여, 만일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보살이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죽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숨 쉬는 나'가 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는 결코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수보리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님이라고 할 그런 '나' 또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가 연등부처님 회상에 머물 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어떤 진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기로는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회상에 머무실 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할 그런 진리는 없겠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진실로 여래가 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그런 진리는 없겠습니다. 수보리여, 만일에 여래가 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그런 진리가 있다면 연등불께서는 내게 이렇게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니 석가모니라 이름하리라.'

수보리여, 여래께서는 진실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그런 진리가 없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내게 이렇게 수기하신 것입니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니 석가모니라 이름하리라.' 그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있는 그대로인 삶, 이런 삶을 사는 이가 여래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사람들은 여래는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그런 진리는 없습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는 참이라고 할 어떤 것도 없고 거짓이라고 할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여래는 '있고 없는 모든 것이 다 깨달음의 진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있고 없는 모든 것'이란 곧 '있고 없는 모든 것'이 아니기에 '있고 없는 모든 것'이라 합니다. 수보리여, 빗대어 말하자면 '어떤 사람의 몸이 크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는 '큰 몸은 큰 몸이 아니라 다만 큰 몸이라 이름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여, 보살도 이와 같아서 '나는 온 중생을 나 없는 행복으로 살아가게 하리라'라고 말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수보리여, 보살에게는 진실로 보살이라 할 어떤 나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이런 까닭에 있고 없는 모든 것들에는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나는 깨달음의 나라를 빛내리라' 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여래가 '깨달음의 나라를 빛낸다' 함은 깨달음의 나라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나라를 빛낸다'라고 말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나에게도 '나'가 없고 대상에도 '나'가 없음을 사무쳐 알면 여래는 이런 보살을 진정한 보살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 금강경 17(본디 없는 나, 究竟無我分)

 

 

<금강경>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이, 불교는 매우 레디컬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기존의 사고 체계를 뒤집어 버린다. 무아(無我)의 선언을 상식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불교는 머리로 이해하거나 의지로 결단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닌 것 같다. 불교는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것 너머에 있다. 그저 착하게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이다.

 

진흙탕 세상이지만 아주 잠깐일지라도 무상(無常)을 체험하는 때가 있다. (실은 무아나 무상의 흉내이며 착각일지도 모른다.)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먼지만도 못하게 느껴지며, 생명에 대한 연민이나 자비심이 밀려온다. 가치관의 전복이 일어난다. 때가 그나마 불교심(佛敎心)에 젖어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넓게는 종교심(宗敎心)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기독교의 회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회개가 단순히 구원받고 천당 가는 게 아닌, 세속적 가치관과의 결별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합니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수보리의 이 질문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하는 물음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나'가 없음을 사무치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뿐이면서 묻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질문은 나를 깨우려는 안간힘인지 모른다. 이런 질문조차 없다면 비틀거리다 결국 쓰러지고 말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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