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금강경[18]

샌. 2020. 4. 12. 11:13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에게 이 세상 눈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는 이 세상 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에게 하늘 눈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는 하늘 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에게 지혜의 눈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는 지혜의 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에게 진리의 눈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는 진리의 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에게 깨달음의 눈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는 깨달음의 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저 갠지스 강 모래알을 두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 갠지스 강 모래알을 두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고, 그 갠지스 강들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부처님 나라가 있다면 그 부처님 나라가 많지 않습니까?"

"참으로 많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어떤 중생의 마음이라도 여래는 하나같이 환히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수보리여, 여래가 말한 마음이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라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수보리여,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지금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다가올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금강경 18(한몸으로 환히 보는 눈, 一體同觀分)

 

 

여기서는 우리 말보다 한자 원문이 더 직감적으로 와 닿는다. 세상 눈, 하늘 눈, 지혜의 눈, 진리의 눈, 깨달음의 눈이 각각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다. 육안은 중생이 세상을 보는 눈이리라. 너와 나를 나누고 차별심으로 세상을 산다. 천안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눈이리라.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내 것, 네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혜안은 그렇게 해서 얻은 지혜의 눈이리라. 많은 지혜자와 성인이 깨닫고 설파한 내용이다. 그 뒤의 법안과 불안에서 불교의 가르침이 드러난다. <금강경>의 가르침이라면 '나 없는 나'까지 닿는 게 아닐까. 앞 분(分)에서도 여래는 말했다. '나'가 없음을 사무치게 알면 진정한 보살이라고 말이다.

 

불교 신자들이 "성불하십시요"라는 인사를 나눈다. 부처가 되라는 말 속에는 불안(佛眼)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엄청난 뜻이 들어 있다. 인간으로서 노력하여 혜안에만 이르러도 드문 일일 것이다. 그 너머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끝 부분의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지금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다가올 마음도 얻을 수 없다'도 한자 원문이 쉽게 와 닿는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다. 마음은 바람 같은 것인지 모른다. 아무리 해도 움켜잡을 수 없다. 잡을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일이겠는가.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나'가 온전히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죽는다' '버린다' '비운다'는 같은 의미다. 옛 '나'가 죽은 뒤 새로 태어난 '나'가 부활이 아닐까. 그런 '하느님 나라'는 여기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 나라'와 상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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