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나는 왜 불온한가

샌. 2020. 4. 4. 12:06

김규항 씨의 글은 늘 나를 부끄럽게 한다. 동시에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았음을 실감한다. 작가의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도 좋다. 그런 기준이라면 나는 엄청난 속물이다. 작가의 짧고 명료한 문장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왜 불온한가>는 2005년에 나왔으니 벌써 15년이 되었다. 그가 진단한 암담한 사회는 - 민주화의 성과가 자본의 차지로 돌아가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갈수록 희망의 빛이 사라지는 -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작가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는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가 사는 세상의 얼개쯤은 알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는 수구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것, 세상은 민족이나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계급으로 나뉜다는 것,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면 우리는 곧 공멸한다는 것 등이다.

 

진보란 기득권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삶이 동반하지 않는 진보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해악이 된다. 과거에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가 지금은 주류로 편입하여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본다.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자유주의적 사고와 자본주의의 단맛을 누리고 있다. 작년의 조국 사태 이후로 여러 생각이 든다. 진보라 자처하는 이들이 진보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몸과 구체적인 삶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진보라고 생각한다.

 

책은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쓴 글을 모아 놓았다. 그중에서 '가치관'이라는 글을 옮긴다.

 

가치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의 출발은 '다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다. '네놈들이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우리도 한 번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라고 하는 생각은 고통스런 삶을 사는 피억압자에게 정당한 것이지만 그게 혁명의 전부는 아니다. 혁명은 단지 '급격한 역할 교환'이 아니다. '한 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혁명의 최종 목표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제아무리 이상적인 분배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해도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가치관'이 살아 있다면 그 사회는 여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남은 셈이다. '다른 가치관'은 오늘처럼 혁명이 요원해 보이는 시절부터 마련되어야 한다. '적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한 혁명은 불가능하다. 혁명을 노래하는 좌파 인텔리들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도 그들이 '적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 자식이 '진보적인 인텔리'가 되길 바랄지언정 고등학교나 마친 노동자가 되길 바라는 좌파 인텔리를 본 적이 있는가? 제 자식이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걸 꺼리거나 적어도 진지하게 부끄러워하는 좌파 인텔리를 본 적이 있는가? '적의 가치관', 즉 '혁명의 대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 진행하는 모든 혁명 운동은 그저 '혁명 게임'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도 존경해 마땅한 좌파 인텔리들 가운데 제 자식 문제에까지 연결되는 '다른 가치관'을 갖는 이는 거의 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천박한 세상을 살아 내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단 한 명도 보지 못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 한 예는 다큐멘타리 감독 김동원이다. 그의 몸은 이 천박한 세상에 묶여 있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강요된 가난은 죄악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은 바로 예수의 모습이다. 그것에 의심이 없다. 이젠 버리는 게 어렵지 않고 갖지 않는 게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틸 수 있다고 믿고 웬만한 건 걱정을 안 한다. 아이들 과외도 못 시키지만 과외를 시키는 게 비정상인 거고 설사 아이들이 대학을 못 가고 가난한 기층 민중으로 살더라도 전혀 걔들한테 불행한 게 아니라고 믿는다. 도시 빈민이나 농민 노동자의 삶 속에는 지식인들이나 중산층들의 삶이 가질 수 없는 게 있다."

"당신에게 가난은 자기 절제인가?"

"편안한 거다. 그러나 무작정 편안한 게 아니라, 가난해야만 가난의 가치를 가질 때만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나는 그걸 따라가는 거다. 가난은 이제 내 가치관이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책 뒤에는 일기가 있다. 지면에 발표하지 않은 삶의 모습과 단상을 적은 것이다. 작가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기

 

2004. 3. 18

어젯밤, 자는 줄 알았던 김건이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왔다. "아빠, 휴지통 옆에 개미가 네 마리나 있어!" "그래?" "아빠, 어떡해? 죽일까?" "개미들이 널 해쳤어?" "물지도 모르잖아." "물었어?" "아니 물지도 모른다고." "김건이 개미집에 갔다고 개미들이 죽이면 좋겠어?" "아니." "개미처럼 작은 동물이든 인간처럼 크고 잘난 체하는 동물이든 생명은 다 같은 거야." "맞아. 그럼 어떡하지?" "그냥 같이 살지그래." "개미하고?" "걔들은 휴지통 옆에 살고, 너는 너대로 살면 되지." "그럴까?" "너무 많아지거나 물면 아빠가 해결해 줄 게." "어떻게?" "단것으로 유인해서 밖에 내놓든가 하면 돼." "알았어." "개미들 어떻게 사는지 잘 관찰해 봐. 걔들도 사람하고 똑같은지, 엄마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이야기도 있고 사랑도 하는지." 김건은 한참을 휴지통 옆에 엎드려 들여다보더니 이 그림을 그렸다. 돋보기 반대편에서 김건을 보았을 개미들은 김건의 마음을 알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처럼 대놓고 제 종족을 잡아먹는 동물은, 잡아먹히면서도 저항할 줄 모르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으니.

 

2004. 4. 2

내가 아는 또 한 사람이 암으로 갔다. 암이라는 병의 끔찍함은 암 자체보다도 암을 대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서양의학, 즉 주류의학은 암을 군사 작전하듯 대한다. 그래서 수많은 암 환자들이 온몸이 독극물로 찌들고 난도질당한 채 비참하게 죽어 간다. 미국이 끊임없는 전쟁을 필요로 하듯, '암 산업'은 끊임없는 암을 필요로 하며, 최후까지 치료에 매달리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암 환자는 죽은 소가 꼬리까지 곰타이 되듯 더 이상 매출을 일으킬 수 없을 때까지 암 산업에 이용되다 죽는다. 그러나 거의 모든 비주류의학들은 암을 '몸의 조화를 되새겨야 할 신호'라 본다. 비주류의학에서 암을 대하는 방식은 암과 싸우는 게 아니라 몸의 조화를 되살림으로써 몸의 일부인 암을 달래는 것이다. 나는 비주류의학이 암을 대하는 방식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암'을 대하는 내 방식은?

 

2004. 4. 24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2004. 6. 11

주례를 수락하면서 유일하게 내세운 조건은 "넥타이는 안 맨다"였다. 그런데 날짜가 다가오자 결혼식이라는 게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나 편한 대로만 하려는구나 싶어 "매보겠다"로 번복했다. 그걸 사려면 어디 백화점에라도 가야 하는데 요 며칠 그 만한 경황이 없었다. 어젯밤엔 결혼식 때 썼던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있나 싶어 뒤져 보았지만 10여 년 전 한 번 걸친 게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예식장에 조금 일찍 가서 근처 백화점에 갔다. 와이셔츠부터. 한 번 입고 말 것이니 바싼 걸 살 이유가 없어서 할인매대로 갔다. 그런데 참 난감하다. 민무늬 흰색은 아예 없는데, 주례가 스트라이프 들어간 걸 입어도 되는 건지, 회색이나 파란색을 입어도 되는 건지.... 10년 이상 라운드 티, 점퍼, 모자로만 지내면서 넥타이 맨 인간들과 상종 한 하는 걸 다행이라 여기며 살아왔으니 그럴밖에, 몇 개 들었다 놨다 하다가 넥타이는 시작도 못 한 채 백화점을 나왔다. 유한함이 철철 넘치는 강남의 백화점 풍경에 진작부터 비위가 상하기도 했다. 주례 대기실에 들어온 신랑이 그런다. "결국 안 하셨네요." "백화점에 갔었어. 그런데...." "끔찍하시죠." 신랑이 킥킥 웃는다. 이젠 됐구나 싶다.

 

2004. 6. 18

며칠 전, 문 앞 계단에 묶어 둔 김건의 자전거를 누가 가져갔다. 이 아파트는 경비업체가 상주하는 데다 1층 현관문이 카드식이라 외부인 출입이 어렵다. 자연히 옆집을 출입하는 아이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옆집 부부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데 밤 늦게까지 수십 명의 아이들이 드나든다. 자전거를 묶어둔 곳은 아이들이 출입하며 하드도 까먹고 컵라면도 먹고 하는 곳이다. 경비실에석 넉넉잡아 하루치 테이프만 돌려 보면 자전거를 가져간 게 누군지 알아낼 수 있단다. 김건과 대화했다. "건이 자전거 누가 가져갔을까?" "어떤 형이." "왜 가져갔을까?"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집이 가난해서 자전거 살 수 없으니까." "잡아야겠지?" "응." "잡아서 혼내줄까?" "아니." "잡아야 한다며." "혼내 주진 말고 그냥 자전거는 돌려받고 싶어."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다시 사주긴 어렵다"고 말해서일 거라고 했다. 이제 막 자전거(는 인간이 만든 가장 근사한 물건이다)의 세계에 빠져 든 아이의 실망이 오죽하랴. 그런데 테이프를 확인하러 가는 게 내키지가 않아 연신 차일피일이다. 돌려받으면 다시 한 아이가 자전거를 잃게 된다.

 

2004. 8. 3

'당연히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인생의 함정'인 경우가 많다. 여성의 경우 '결혼'이 그렇다. 믿을 수 없이 많은 똑똑한 여성들이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처럼, 그 함정에 빠져 파괴되어 간다. 여자 후배들과 결혼에 대해 대화하게 되면 부러, 조금은 과격하게 말하곤 한다. "결혼은 여성이 가부장제에 자신을 봉헌하는 절차다." "가장 좋은 남편이란 가부장제의 가장 좋은 관리인이기도 하다." "가장 기초적인 결혼 준비는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상세한 규칙을 정하는 일이다." "어떤 그럴싸한 이유로도 일을 포기해선 안 된다." 등등.

 

2004. 9. 23

사회 변화엔 두 가지가 있다. 진정한 변화와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 후자를 개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개혁을 경계하는 건 개혁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의미에 집착할수록 어느새 진정한 변화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진정한 목표다.

 

2004. 10. 18

일요일. 저녁을 먹고 김단과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누가 벨을 눌렀다. '건이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기에 누구냐 물으니 며칠 전에 건이와 사고가 난 택배 트럭 기사의 부인이란다. 아내도 없고 해서 대신 나가 보니 아주머니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정색을 하며 건이 상처가 넘어져 다친 정도일 뿐이고, 설사 더 다쳤다 해도 부인의 남편에겐 전혀 잘못이 없으니 이러면 안 된다고 거듭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그래도 머리를 조아린다. "이거 건이 먹으라고..." 큼지막한 상자를 건네주는데 포도와 삼겹살이다.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도로 돌려 보내는 것도 강퍅한 일이라 "좋은 마음으로 알겠습니다" 하며 가지고 들어왔다. 며칠 전 사고란, 김건이 킥보드를 타고 가다가 택배 트럭과 부딪힌 일이다. 김건이 서 있는 트럭을 미처 못 보고 달리다 부딪힌 것인데, 시동을 막 건 순간이라 김건이나 택배 트럭 기사나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택배 트럭 기사에겐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날 저녁부터 "과일이라도 들고 찾아오겠다"고 계속 전화를 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한사코 거절했는데 오늘은 아예 그의 부인이 연락도 없이 찾아와 꼼짝없이 선물까지 받아 챙기게 된 것이다. 삼겹살은 냉장고에 넣어 두고 포도는 씻어서 아이들에게 내주었다. 천연덕스럽게 포도를 먹는 김건이 마땅치 않아서 한마디 했다. "김건, 너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아저씨하고 아줌마가 놀라고 걱정하고 그러시잖아. 포도가 넘어가냐?" "죄송해요." 이럴 땐 꼭 존댓말이다. 물론 포도는 아무런 문제없이 입으로 들어간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니 아이인 게지, 하고 더는 말을 안 하기로 했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코 찾아오다니, 참으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구나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오죽했으면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그렇게까지 마음을 썼을까 싶어서다. 요즘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면 나쁜 사회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제 이해가 걸린 일이라면 모조리 눈알이 뒤집어져서 악귀처럼 덤벼든다.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없다. 그런 세상에서 제 차에 남의 아이가 부딪혔으니 얼마나 큰일이 되는가. 나쁜 사회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고 나빠진 사람들은 다시 사회를 더 나쁘게 만든다. 이렇게 망해 가는 걸까....

 

2005. 1. 9

별자리를 잘 아는 사람을 보면 많이 부럽다. 그런 사람들의 눈엔 낱낱의 별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살이 붙어 곰으로 여인으로 전갈로 보이고 보통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별도 보인단다.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은 아닌 셈이다. 그렇게까지 되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시간도 꽤 걸린다는데 나는 다음 겨울이 오기 전까지 밤하늘의 얼개라도 익혀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대신 구름은 늘 본다. 구름은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곰으로 여인으로 전갈로 보인다. 어제 아침 부여 근처를 지나는데 흰수염고래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차를 세우고 한참 봤다. 구름을 보는 건 미룰 수 없다. 어느새 구름처럼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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