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여유당

샌. 2020. 7. 11. 12:35

마음이 울적한 탓인지 '여유당'을 찾고 싶었다. '여유당(與猶堂)'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로 다산이 태어날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마재마을)였지만,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되어 있다.

선생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천주교와의 연루 등 정치적 비판을 견디지 못한 다산은 이듬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했다. 선생은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두지를 못한다.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의 말에 '여(與)여!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을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은 편안한 상태에서 낙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노리는 반대파의 칼날을 의식하고 있었다. '여유(與猶)'라는 당호에서 그 심정이 절절히 전해진다. 곧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다산의 생애는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조정에서 일한 18년, 천주교 이력이 문제 되어 유배를 한 강진 생활 18년,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 1818년에 고향 마재로 돌아와 생을 마칠 때까지 보낸 17년이다. 말년의 생도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유배에서 해제가 됐으나 복권은 되지 않았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고향에 돌아온 이래 7년, 문을 닫고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노라니 머슴종과 밥 짓는 계집종조차도 함께 말도 걸어주지 않더이다. 낮 동안 보이는 거라고는 구름과 파란 하늘뿐이요, 밤새도록 들리는 거라고는 벌레의 울음이나 댓잎 스치는 소리뿐이라오."

어려웠던 시기에 다산은 엄청난 저작 활동을 한다. 경집과 문집 합쳐 무려 499권에 이르는 책을 남겼다. 다산의 네 형제 중 천주교에 제일 몰두한 정약종은 순교했고, 정약전은 다산과 함께 귀양을 가서 흑산도에서 죽었다. 유일하게 장남인 정약현이 집안을 지키며 박해를 피했다. 시대의 회오리바람에 정면으로 부딪친 집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유당' 현판을 걸 때 다산의 나이 39세였다. '겨울에 살짝 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한글로 읽는 '여유'는 '넉넉하며 너그러운 마음'이다. 여유당 툇마루에 앉아 나는 그런 '여유(餘裕)'를 생각한다.

다산 묘는 생가 뒤 언덕에 있다. 묘에 서면 생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10년 전, 이곳에 '여유당' 현판을 걸고 자신의 처신을 고민했을 선생을 생각해 본다. 다산의 네 형제는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갔다. 천주교를 떠난 선생이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었으리라. 시대의 모순을 직시했으나 성격상 혁명가가 될 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선생의 장점이면서 한계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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