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근심이 비행기에 오르니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래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지 뭐. 여행을 떠나는 맛이 본래 이런 것이다. 집을 떠날 때의 돌연한 기분 전환 즉,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향해 가는 기대와 설렘이다.
비행기 안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중학교 동기 친구다.
“야, 이게 누구로? 니 어데 가노?”
동향 사람을 만나면 사투리가 나도 모르게 터진다. 사투리는 정서적 친밀감을 주지만 과잉 수용하면 독이 되는 걸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로까지 나가면 곤란하다(이 친구 SNS에 들어갔다가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봤다. 뒷날 일이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포카라에 열흘 정도 쉬러 간단다. 옆에는 부인이 앉아 있다. 이 친구는 안나푸르나 라운딩도 한 프로급이다. 돈, 시간, 체력의 삼박자를 골고루 갖춰 동기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보통 셋 중 하나는 삐걱거리는데 거의 삼위일체의 완전체다. 남 얘기할 때가 아니다. 나 또한 감사할 거리를 찾자면 차고 넘치지 않는가.
인천공항에서 카트만두까지 7시간이 걸린다. 카트만두공항에 오후 2시에 도착해서 밖에 나가니 ‘네팔짱’에서 나와 꽃다발을 걸어주며 환영한다. 해외에 나가 금메달이라도 따고 돌아온 것 같아 멋쩍다. 옆에서는 신발도 신지 않은 꾀죄죄한 네팔 아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Korean money!”라고 외치며 따라붙는다.
오늘은 카트만두 임팔라호텔에서 묵는다. 말이 호텔이지 우리로 치면 여관 수준이다. 난방이 되지 않으니 방 안이 도리어 바깥보다 더 춥다. 미리 침대 위에 침낭을 깔아둔다. 하루 숙박비가 400루피(8,000원)니 더 뭘 바라는 것도 염치가 없다.
카트만두는 별세계다. 타임머신을 타고 홀연히 ‘스타 워즈’에 나오는 미래의 우주 도시에 떨어진 것 같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소리,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굉음, 대기에 가득한 퀴퀴한 냄새, 좁은 골목의 북적이는 인파, 거리는 온갖 인종이 섞여 북적거린다. 제 정신줄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다.
카트만두의 명동이라는 타멜 거리를 구경한 뒤 저녁 식사는 카트만두 최고급 식당(K-TOO)에서 야크 스테이크로 트레킹 전의 마지막 호사를 부려본다. 여기서는 맥주 한 병이 300루피니 호텔 방값과 비슷하다. 둘러보니 손님은 전부 외국인이다. 정전이 되어 식당 안은 촛불 분위기로 변한다. 네팔은 정국이 불안하여 수도 카트만두에서조차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전기가 나가면 가게마다 자가 발전기를 돌리느라 소음과 매연이 엄청나다.
타멜 거리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현대식 가게도 많다. 화려한 가게 앞에는 몽둥이를 든 경비원이 지키고 있다. 거지 아이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거리에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다. 간식을 산 뒤 마트에서 나오며 빵을 주니 남루한 아이는 허겁지겁 걸신들린 듯 먹는다.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네팔은 왕정 지배층과 기존 체제에 반대하는 마오이스트의 충돌로 나라 기능이 마비 상태다.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아 카트만두 시내는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다. 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치 탓이 크다. 그러나 상대적 가난과 불평등 문제는 부국도 자유롭지 못하다. 네팔의 가난한 사람이 선진국의 가난한 사람보다 더 불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행복지수는 방글라데시나 네팔 같은 빈국에서 더 높게 나온다. 행복은 소유하는 물질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네팔의 핍박한 현실과 네팔인들의 천진한 표정 사이의 괴리는 이번 트레킹 내내 마주쳐야 할 것 같다. 이는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압박으로 돌아올 것이다.
피곤하고 씁쓰레한 채로 호텔에 돌아와 침낭 안에 들어간다. 네팔의 첫인상이 안 좋아 우울하다. 내 체온으로나마 이 차가운 밤을 견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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