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루벤시까지 가는 날이다. 거리는 140km지만 길이 험해서 9시간이 걸린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캄캄한 호텔방에서 헤드렌턴에 의지해 세수를 하고 짐을 꾸린다.
함께 떠나는 일행은 우리 팀원 12명에 현지인 가이드 2명과 포터 12명, 총 26명이다. 전세 낸 중형 버스를 타고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출발한다. 조금만 늦으면 카트만두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서울이나 카트만두나 도시는 어디나 교통 체증이 문제다.
팀원 12명이 묘하게 남자 6명, 여자 6명이다. 떠나오기 전에 아내는 미심쩍은 듯 말했다.
“가는 사람들이 남녀 동수라고? 설마 일부러 짝을 맞춘 건 아니지?”
마치 우리가 히말라야로 쌍쌍파티라도 떠나는 듯 아내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여자의 촉은 가끔 엉뚱한 데를 겨냥하기도 한다.
버스 창밖에 비치는 네팔인들의 얼굴은 무심한 듯 슬퍼 보인다. 집 밖에 나와 우리를 바라보지만 아무 표정이 없이 무미건조하다. 달관한 듯 또는 체념한 듯한 마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아침이지만 일을 나가기보다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는 남자가 많다. 우리한테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지만 여기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 내가 남자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인도-아리안족 피가 섞인 여인의 큰 눈은 무척 아름답다.
뒤쪽 자리에 앉은 포터들은 마치 소풍이나 떠나는 듯 우리보다 더 들떠 있다. 버스는 비포장 꼬부랑 산길을 잘도 나아간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좁은 길이지만 급커브에서도 속도를 늦출 줄 모른다. 돌기 전에 클랙슨을 울릴 뿐이다. 클랙슨 소리는 우리 같은 ‘빵’이 아니라 ‘빵빠라밤’으로 리드미컬하다. 커브-빵빠라밤, 커브-빵빠라밤, 재미있어서 같이 박자를 맞춘다. 그런 소동에도 뒷자리의 산마루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가 꺾어진다.
차에 타면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진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국의 풍경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목적지보다도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이 더 흥미롭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다. 할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7시간 내내 기차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 구경만 하려고 해서 할머니는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역에 내렸을 때는 얼굴이 새까맸다고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당시는 석탄을 때서 가는 증기기관차였다. 낮에 운전대를 잡으면 잠이 와서 운전하기 어렵다는 친구가 꽤 있다. 나는 반대로 정신이 초롱초롱해진다.
카트만두를 벗어나서 한참 달리자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꼬부랑길을 잘도 달리던 버스는 고속도로 같은 평평한 길에서 고장이 나 멈춰 선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다반사인 듯 누구도 조바심치지 않는다. 몇 사람이 버스 밑에 들어가 망치로 차체를 때리면서 수리를 한다. 덕분에 우리는 휴식 시간을 얻어 주변을 산책하며 쉰다. 길가의 꽃을 보고, 도로를 따라 흐르는 강에 내려가 히말라야 빙하가 녹은 물에 손도 담가본다. 트리슐리강인데 네팔을 지나 인도에서 갠지스강과 합류한다고 한다.
넓은 강에는 자갈이 많은데 여자들이 군데군데 모여 건축자재로 쓰일 돌을 망치로 깨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엄마와 딸로 보이는 모녀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 딸은 열 살 내외의 어린 소녀다. 이 작업은 위험해서 돌을 깨다가 파편이 튀어 눈을 상하는 일이 흔하다. 손가락을 잃는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네팔 전원 풍경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숨어 있다.
수리를 마친 버스는 한 시간 만에 다시 출발한다. 길의 후반부는 스릴 만점의 지그재그 험로다. 버스는 천길 낭떠러지를 옆에 끼고 비틀거리며 전진한다. 왼쪽으로는 눈을 돌리기가 싫다. 만약 삐끗해서 추락한다면 도대체 몇 바퀴를 굴러야 바닥에 닿을까. 네팔까지 와서 그토록 바라던 히말라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온갖 망상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런데도 앞에 가는 로컬버스 지붕에 탄 두 아이는 영화의 스턴트맨처럼 결투 흉내를 내며 재미있어한다. 주먹을 맞고 쓰러지는 시늉을 할 때는 버스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거의 서커스 수준의 실력이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까 싶어 손잡이를 쥔 내 손은 땀이 흠뻑 젖는다.
오후 3시에 목적지인 샤브루벤시에 도착하다. “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은 하나 더 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결린 허리가 샤브루벤시로 오는 도중에 말끔히 나았다. 덜컹거리는 네팔 버스 마사지를 아홉 시간이나 받으니 저절로 치료가 된 것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의 성수기는 봄과 가을이다. 겨울에는 아무래도 찾는 사람이 적다. 겨울에는 마을에 있는 롯지의 상당수가 문을 닫는다. 성수기 때는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일 샤브루벤시 거리가 우리 버스만 정차한 채 한산하다. 겨울에는 그나마 한국 사람이 주로 찾아와 여기서는 겨울을 ‘Korean seaso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를 실어준 버스 기사는 다시 9시간을 달려 카트만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귀찮은 기색 없이 얼굴은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숙소인 붓다 롯지에 짐을 풀고 야채볶음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다. 마을을 산책하는 중에 동쪽 산 위로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른다. 허리 걱정도 덜었고, 이젠 내일부터 걷는 일만 남았다. 왠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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