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 이젠 열쇠를 보기 힘들다. 집이나 사무실에는 도어록이 되어 있어 비밀번호를 이용해 출입한다. 차 안에 지도가 사라진 것도 마찬가지다. 길을 찾아가자면 지도가 필수였는데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대신한다.
그러다 보니 기억해야 할 비밀번호가 너무 많다. 일일이 구분하지 못하다 보니 비밀번호를 적어두는 장부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내 경우도 비밀번호 비망록이 따로 있다. 나는 도대체 몇 개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을까.
현관, 휴대폰, 와이파이, 카드 2, 도서관, 포털 3, 통신사, 카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페이, 원드라이브, 삼성계정, 넷플릭스, 국립공원, 광릉수목원, 사진 2, 야생화 2, 걷기 3, 바둑 2, 모야모, 교직원공제회, 국민비서구삐
이것만 해도 30개다. 비밀번호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면 간단하련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숫자나 문자만 아니라 특수문자까지 넣으라는 곳도 있고 자릿수도 다 다르다. 그러니 만들 때마다 골머리를 썩인다. 서로 중복되는 비번도 있지만 내 경우는 엄청 복잡하다. 이러니 어찌 비밀번호를 다 외울 수 있겠는가.
ID나 닉네임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이름은 이미 타인이 등록해 놓아서 사람들이 안 쓰는 말을 만들어야 한다. 오죽하면 '닉네임 생성기'까지 있겠는가. 새로 가입하려다 닉네임 고민하느라 포기하는 일도 있다.
보안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굳이 비밀번호를 쓸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비밀번호 대신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시스템을 개발해 준다면 히트를 치지 않을까.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낭패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집에 들어오려고 현관문 앞에 섰는데 머리가 하얘지면서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수백 번 누른 번호인데 이럴 수 있다니 너무 황당했다. 마침 아내가 집안에 있어서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늘 휴대폰의 단축키를 사용하다 보니 외우는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다. 아내 번호마저 모르니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전화를 걸 때 단축키를 쓰지 않고 직접 전화번호를 입력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한 번도 실천하지는 못했다. 편리함이 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머리 쓸 일이 없어진다. 차의 내비게이션도 마찬가지다. 다 알아서 해 주니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궁리할 필요가 없다. 옛날에는 미래 인류가 머리만 발달한 가분수형으로 되리라 예상했는데 실은 반대가 될지 모른다. 편리하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언젠가는 복잡한 비밀번호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비밀번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집안 살림을 정리하듯 긴요하지 않은 것은 버리고, 비밀번호는 두세 개 정도로 줄여야겠다.
숫자에 약한 나로서는 디지털 시대의 비밀번호의 범람이 바람직하지 않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찰카닥,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날로그적 감성이란 것도 있다. 사진을 찍을 때 옛 SLR의 미러가 작동하는 무거운 셔터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사이 카메라의 "치직"하는 전자식 셔터 소리는 오줌을 누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처럼 찜찜하다. 가끔 SLR을 꺼내 셔터를 눌러보면서 "그래, 이게 바로 사진 찍는 맛이지"라며 아련해진다. 생의 대부분을 아날로그로 살아온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