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사진이지만 1960년도 초반에 사용된 국민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를 봤다. 시기를 맞춰 보니 내가 썼었을 교과서여서 감회가 깊었다. 책 내용 중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다. 60년 전이라 가물하지만 이 이야기를 국민학생일 때 접했던 기억은 난다. 그런데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었다는 건 새롭게 알았다.
철부지 시절에 이 일화가 주는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을까. 그 옛날의 나를 떠올리며 다시 읽어본다.
옛날 어느 시골에 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같은 논에 벼를 심어서 부지런히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 잘 가꾸었습니다. 벼는 무럭무럭 자라서 가을이 되자 곧 벼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형님. 벼가 잘 되었지요. 이렇게 잘 여물었어요."
"참 잘 되었다. 언제 곧 베어야 할 거야."
누렇게 익은 논을 바라보며 형제는 기뻐하였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형제는 벼를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님은 동쪽에서 베어 오세요. 저는 서쪽에서 베어갈 테니."
"그래라, 누가 더 많이 베나 내기를 할까?"
형제는 부지런히 벼를 베었습니다.
형제는 온통 땀에 젖었지만, 쉬지 않고 열심히 베어나갔습니다.
넓은 논도 어느덧 다 베어 훤한 벌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 누가 많이 베었나 한군데 쌓아보자."
형제는 자기가 벤 벼를 각각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님은 동쪽에 커다란 낟가리가 되게 벼를 쌓았습니다.
동생은 서쪽에 높다랗게 쌓았습니다.
"누가 많이 베었을까?"
서로 대보았지만 둘은 똑 같았습니다.
형제는 서로 한 더미씩 의좋게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그날 밤, 동생은 저녁을 먹고 나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벼를 형님과 똑같이 나누어 가졌지만, 잘 생각해 보니 암만해도 안 됐어. 형님댁엔 식구가 많거든."
동생은 형님에게 벼를 보내드리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말을 하였다가는 형님이 받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옳지. 형님 몰래 갖다 드려야지."
동생은 깜깜한 논으로 가서 벼를 나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자, 이제 이만하면 형님이 더 많겠지."
동생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형님도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동생과 같이 똑같이 벼를 나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했어. 동생은 살림을 새로 시작했으니까 살림에 드는 것이 더 많을 거야."
형님은 밤중에 논으로 나갔습니다.
"영차!"
형님은 자기의 벼를 동생의 낟가리에 갖다 쌓았습니다.
"자, 이만하면 되겠지. 아마 살림에 도움이 될 거야."
형님도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이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퍽 기뻤습니다.
날이 밝아서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생은 논에 나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젯밤에 그만큼 많은 벼를 형님 낟가리에 옮겨놓았는데, 이게 어찌 된 셈입니까? 벼는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도 하다."
형님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형님은 또 몰래 논으로 가서 자기의 벼를 동생 낟가리에 쌓았습니다.
"이만하면 동생 것이 더 많겠지."
형님은 기뻐하며 동생의 낟가리를 쳐다보았습니다.
형님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이번에는 동생이 논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벼를 끙끙 짊어지고 가서 형님의 낟가리에 잔뜩 쌓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형님과 동생은 몰래 다시 논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낟가리에는 여전히 똑같이 쌓여있었습니다.
"참 이상도 하다."
"참 이상도 하다."
형님과 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몰랐습니다.
다시 밤이 되자 형님과 동생은 몰래 논으로 가서 또 벼를 나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저쪽에서 누가 옵니다. 형님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구름 사이에서 달님이 환히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이구, 형님 아니십니까?"
"아, 너였구나."
이제야 형제는 벼 낟가리가 줄어들지 않은 까닭을 깨달았습니다.
형제는 저도 모르게 볏단을 내던지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얼싸안았습니다.
하늘에서 달님이 웃으며 보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형제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옛날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다는 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런 미담보다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더 인간의 마음에 가깝지 않을까.
내 아킬레스건은 형제자매와의 우애다. 이 점이 살아계신 노모에 대한 최대의 불효이기도 하다. 나 역시 부모가 되고 이만큼 나이 들고 보니 무엇보다 자식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다. 효도가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효도가 없다. 나는 그 점에서 온전히 자격 미달이다.
형제자매 사이에는 - 특히 형제들 사이에 - 경쟁과 시기 심리가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교과서의 동화 같은 이야기보다는 누구 볏단이 더 높은지 눈을 흘기는 게 더 우리 삶에 가깝다. 남과 달리 한 번 서운해진 감정은 형제 사이에서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잘못되면 남보다 못하기까지 한다. 형제 사이에도 일방적인 시혜 관계는 없다. 철저한 기브 앤드 테이크를 바탕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과서 이야기 같은 천연기념물 집안도 가끔 본다.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는 씁쓸하다. 이생에서 형제자매간 우애를 회복하기는 이미 글렀다. 각자 제 가정 꾸리고 무난히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밖에 도리가 없다. 서로간에 원망만 없으면 다행이다. 아, 수신제가(修身齊家)는 얼마나 높은 봉우리인가. 나로서는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게 상책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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