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를 열어보니 어느 날의 일기에 아무런 설명 없이 '在欲無欲'이라는 한자가 적혀 있다. 그 네 글자가 내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해석하면 '욕심 속에서 욕심 없이 산다'는 뜻이겠다. 어디서 보고 노트에 옮겨 적은 것일까. 인터넷에서 출처를 찾아보니 '휴휴암주좌선문(休休庵主坐禪文)'이다. 옛날 중국에 있던 휴휴암이라는 절의 주지 스님이 쓴 글로 '在欲無欲'이 나오는 부분은 이렇다.
在欲無欲 居塵離塵 謂之禪
욕심의 세계에 있으나 욕심이 없으며 티끌 세상에 살면서도 번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재욕무욕 거진이진(在欲無欲 居塵離塵) - 욕심의 세계에 있으나 욕심이 없고, 티끌 세상에 살면서 티끌에 오염되지 않는다. 밥을 먹되 밥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돈을 아끼되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세계란다.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살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치와 같다.
앞의 욕(欲)은 세상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일 수도 있겠다.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다.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인간은 거기에 더해 채워지지 않는 욕망/욕심을 가지고 있다. 욕망이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챙기고,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떠넘기는 심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에는 절제가 없다는 점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욕망을 더 커지고 갈증은 심해진다. 갈증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욕망의 뿌리를 끊어버린 분들이시다. 그러나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욕망대로 처신하다가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욕망(欲望)은 욕망(欲亡)으로도 읽힌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는 망해 버린다.
나는 요사이 나를 귀찮게 하는 저놈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득차 있다. 신경 덜 쓰고 편하게 살고 싶은데 꼭 한두 놈이 내 심사를 긁어놓는다. 저놈만 없다면 세상살이가 힘들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헛된 망상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저놈이 없어진다면 또 다른 놈이 나타날 것이다. 인생이 나를 편하게 놔둘 것 같은가. 저놈만 없으면 편해질 것 같은 생각이야말로 전도망상이고 욕심이다. 저놈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뒤집어 생각하는 게 수행이며 선(禪)이 아닐까.
재욕무욕(在欲無欲), 욕심 속에서 욕심 없이 사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나는 아득한 심정으로 20년 전 노트의 내 글씨를 바라본다. 이만큼 세월이 지났건만 마당에는 내가 흘린 피만 낭자하다. 다짐을 하면 무엇하나. 뒤돌아서면 걸려 넘어지는 것을. 고개를 돌리면 창 밖에는 청명한 겨울 하늘이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