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어오면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말이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 사전을 찾아보니 '그럭저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로, 그렇게 저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덧'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지내는 상태를 그럭저럭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그럭저럭'보다 좀 더 진화한 말이 '그러려니'가 아닐까 싶다. '그러려니'에는 세상살이를 흘러가는 대로 관조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그럭저럭'보다 내 의지가 더 탈색된 느낌으로, 체념에 가까운 태도다. [체념(諦念)은 '살필 체(諦)'에 '생각할 념(念)'으로 원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본뜻은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다.]
일흔이 되니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세상의 참여자에서 이젠 방관자가 되는 것 같다. 세상의 흐름을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고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오면 맞고, 가면 보낸다. 거기에 희로애락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려니'의 마음가짐이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송곳이다. 타인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날카롭게 찔러대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내가 만든 상처로 가득하다.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면 한없이 헤매기만 한다. 이젠 '그러려니'의 망치로 송곳 끝을 뭉툭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성낼 일, 안달할 일도 줄어들 게 아닌가.
작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이런 글이 있다.
인생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을 꼭 맞추어주랴
마땅찮은 일 있어도
세상은 다 그런거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다정했던 사람 멀어져 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 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잘 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사는 것이 좋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피하신 적 있으셨다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는 너무 마음 쓰고 아파하지 말자
세상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
부족한데도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컴컴한 겨울 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보여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그래,
우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