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북쪽으로 원수의 상류에서 노닐다가
은분의 언덕에 올랐다.
여기서 우연히 '무위위'를 만났다.
지혜가 무위위에게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네.
어떻게 생각하고 꾀하면 도를 알 수 있는가?
어디에 처하고 무엇을 하면 도에 거처할 수 있는가?
누구를 따르고 누구에게 인도를 받으면
도를 얻을 수 있는가?"
세 가지 질문에 무위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답을 몰랐던 것이다.
知北遊於元水之上
登隱분之丘
而適遭無爲謂焉
知謂無爲謂曰
予欲有問乎若
何思何慮則知道
何處何服則安道
何從何道
則得道
三問而無爲謂不答也
非不答不知答也
- 知北遊 1
이야기는 계속된다. 지혜는 답을 얻지 못하자 '광굴'을 찾아갔다. 그리고 같은 말로 광굴에게 물었다. 광굴은 말을 하려는 중간에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지혜는 이번에는 황제를 찾아가 물었다. 황제는 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무위위는 참으로 옳았고, 광굴은 도에 가깝고, 나와 너는 끝내 가깝지 못했다. 대저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 자다."
도(道)가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노장사상의 기본이다.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 역시 같은 의미다. 이는 '도는 말로 표현될 수 없으며, 말로 표현된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도의 세계는 인간의 지식으로 헤아리거나 머리로 궁리해서 이해하거나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설명될 수 없는 것으므로 도는 '무(無)'이고 혼돈이다. 인간의 두뇌, 그중에서도 좌뇌는 분별지를 특징으로 한다. 분별지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 틀이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는 만물에 구별이 없고 귀천도 없다. 인간의 사고 틀을 초월하지 않고서는 도를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도덕경을 썼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쳐다볼 수 없다. 부처님도 평생을 설법하며 보냈다. 염화시중의 아름다운 일화도있지만 부처님도역시 말을 방편으로 삼았다. 장자가 말하는 것은 지(知)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라는 게 아닐까. 그것이 지혜다. 특히 지금의 과학기술 문명은 좌뇌의 사고 틀로 만들어진 것이다. 물(物)에 대한 지식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다른 세계를 무시해 버리기 쉽다. 그런 세계관은 반드시 문명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인류는 좀더 겸손해져야 한다.
'도는 말로 이룰 수 없고, 덕은 말로 이르지 못한다.'[道不可致 德不可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