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132]

샌. 2010. 8. 22. 14:03

공자가 말했다.

"도에 노니는 것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이것을 얻으면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즐거운 것이다.

지극한 아름다움을 얻어 지극한 즐거움에 노니는 사람을

지인(至人)이라 한다."

공자가 말했다.

"그 방술을 듣고 싶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풀을 먹는 짐승은 철이 바뀌는 덤불을 걱정하지 않고

물에 사는 벌레는 철이 바뀌는 늪을 걱정하지 않는다.

조그만 변화가 생겨도 대도를 잃지 않으므로

희로애락이 가슴속에 들어와 머물지 않는다.

무릇 천하라는 것도 만물이 일체가 되는 곳이요,

그 일체됨을 알고 만물이 대동하면

내 몸은 티끌 같고

사생종시(死生終始)는 낮과 밤과 같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니

하물며 얻고 잃음, 화와 복이 끼어든다고 어지럽히겠는가?

관속(官屬)을 진흙처럼 버리는 것은

몸이 관속보다 귀한 것임을 안 것이니

내 몸보다 귀한 것은

어떤 변화에도 잃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물은 천변만화하여 처음도 끝도 없으니

대저 근심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미 도를 이룬 자는 이런 변화에서 해방된 것이다."

 

孔子曰

請問遊是

老聃曰

夫得是 至美至樂也

得至美而遊乎至樂

謂之至人

孔子曰

願聞其方

草食之獸 不疾易藪

水生之蟲 不疾易水

行小變 而不失其大常也

喜怒哀樂不入於胸次

夫天下也者 萬物之所一也

得其所一而同焉

則四肢百體 將爲塵垢

而死生終始 將爲晝夜

而莫之能滑

而況得喪禍福之所介乎

棄隸者若其泥塗

知身貴於隸也

貴在於我

而不失於變

且萬化而未始有極也

夫孰足以患心

已爲道者解乎此

 

- 田子方 2

 

공자와 노자의 가상의 대화를 통해서 도(道)를 이룬 자, 지인(至人)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공자가 도에 노니는 방술을 물었는데 사실 이 길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한 수 아래로 나오는 이런 장면은 장자에 여러 차례 나오는데 장자 후대의 제자들의 의도 섞인 장난일 것이다.

 

공자의 질문에 노자는 차별심과 집착을 버릴 것을 주문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분명 차이가 있다. 생김새도 다르고 성질도 다르다. 그러나 하늘이 준 각 존재의 특성이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 상대적 기준에 의하여 만물을 재단하여서는 안 된다. 절대적 기준은없다. A는 A의 길이 있고, B는 B의 길이 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갇혀 세상을 보는 것이 차별심이다. 노자는 차별심의 미망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우주는 무상(無常)하다. 쉼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한 상태에매달린다.집착이 근심과 불안을 낳는다. '짐승은 철이 바뀌는 덤불을 걱정하지 않고, 벌레는 철이 바뀌는 늪을 걱정하지 않는다.'라는 비유는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 보시오. 들의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해 보시오.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제 수명을 단 한 시간인들 보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왜 쓸데 없는 걱정을 합니까?"

 

인간의 희노애락이란 대부분이 집착과 애욕의 결과다. 그러나 만물이 일체임을 체험한 사람은 얻고 잃음에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생과 사도 마찬가지다. 만물은 천변만화하여 시작과 끝이 없으니 근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차별심이나 집착을 버리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삶은 다르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좁다. 지인(至人)이란도(道)에 이르는 길에서 지행(知行)이 일치하는 사람일 것이다.그런 사람만이 지극한 아름다움을 얻어 지극한 즐거움에 노닐 수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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