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任尹摯堂, 1721~1793)은 조선에서 드문 여성 성리학자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 연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존여비의 유교 가부장사회에서 성리학을 통해 인격 완성을 추구한 임윤지당은 샛별처럼 빛나는 존재다. 그가 다짐하듯 강조한 말이 있다.
"나는 비록 여자지만 부여받은 본성은 남녀간에 다름이 없다."
임윤지당은 유복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글을 깨쳤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가족들은 학문을 닦도록 도와주었고, 특히 오빠인 임성주는 평생의 후원자가 되었다.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말하며 임성주는 그의 재질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그가 여사(女士)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좋은 환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19살에 원주에 사는 선비 신광유에게 시집을 갔지만 친정과의 교류를 통해 학문적 도움을 받았다. 일찍 남편을 잃고 양자로 아들을 두었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들보다 출산이나 양육, 집안일을 하는 데에 시간을 뺏기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친정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면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임윤지당은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등 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죽은 뒤 정조 20년에 후학들이 <윤지당 유고>를 펴냈다. 조선 시대에 학문을 연구하는 여성들이 더러 있었지만 윤지당처럼 글로 남겨진 경우는 없었다. 성리학 사상에서 윤지당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고루한 인습을 깬 삶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존중한다. 윤지당은 학문을 알게 된 뒤로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둘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면서 몰두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 성리의 학문이 있음을 알았고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더욱 좋아하여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임윤지당은 조선 사회에서 여성 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시집을 간 뒤에는 대부분의 여성이 자신의 재능을 죽이고 여성의 도리를 다하는 데 힘을 쏟아야 했다. 난설헌이나 사임당도 마찬가지였다. 18세기를 살았던 여성인 김운(金雲)은 간절한 소망을 이렇게 적었다.
"남자로 태어난다면 깊은 산속에 집을 짓고는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쌓아두고 그 가운데서 늙어가고 싶다."
임윤지당은 생의 후반부에 들면서 형제와 아들, 조카의 죽음을 겪으며 비통함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하늘이 이런 운명을 준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마음을 쓰고 성질을 참아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키워주려는 것이라며 타자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참는 것이 덕이 된다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더욱 학문에 정진했다. 성리학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때 지은 '인잠(忍箴)'이라는 글의 일부다.
이 생애는 어그러짐 많으니
죽음이 오히려 즐거우리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운명이니
나의 의는 어떠할까?
죽음이 마땅한 것이라면
집으로 돌아가듯 하리라
오직 자신을 수양하여
하늘에 따르리라
온갖 근심 생각지 않고
분수를 지켜 편안하리라
어떻게 하면 편안할까?
인내가 덕이 되겠네
어떻게 인내할까?
뜻을 세워 독실하게 해야 한다
<임윤지당 평전>은 한겨레출판에서 내는 인물 시리즈 중 한 권이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김경미 선생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