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학교도 병원도 없는 세상

샌. 2010. 4. 19. 11:11

이반 일리치는 50대 중반부터 뺨에 종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혹은 점점 커지고 고통도 심해져 아편을 먹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리치는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다. 병원 없는 세상을 꿈꾼 그의 신념대로 자신도 철저히 병원 진료를 거부하며 살았다. 그는 종양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의학적인 처치를 하지 않았고, 특별히 민간요법이나 자연요법을 찾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종양 때문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수술을 거부하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20년을 산 것이다.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일리치의 사상은 문명과 인간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한다. 또한 일리치가 위대한 점은 자신의 말과 글에서 표명한 신념대로 일생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반 일리치는 가톨릭 사제였지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사제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가 투쟁한 것은 현대문명의 불경스러움이었으며 사실 일리치만큼 근대 산업문명을 근원적으로 부정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이 세계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다고 말했다. 그런 고정관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병원과 학교였다. 그는 교육이나 의료 제도의 개선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아니라 아예 학교나 병원 자체를 부정했다. 그가 쓴 <의료의 한계>라는 책은 ‘오늘날 건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현대의학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병원이나 의사가 오히려 병을 만들고 건강을 해친다.


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현재의 의료 시스템이 인간의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율성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병원에 대한 의존이 커지면 의사의 진료를 받기 전에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안심하지 못한다. 감기만 걸려도 의례 병원을 찾아간다. 또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하고 병원의 처방만을 맹신한다. 결국은 의료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만 불행히도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물론 현대 의료 기술이 질병 극복이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사나 약에 대한 종속은 인간이 자신의 건강을 주체적으로 보살피는 능력을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얼마 전 TV로 방영된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원시 부족의 싱싱한 생명력은 이제 문명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불과 두서너 세대 전만 해도 마을마다 전해져 오던 민간 의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독점적인 의료 산업에 의해 대부분이 사라졌다. 소위 전문가가 아니면 병을 고칠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병과 죽음은 생명체가 겪게 되는 자연스런 자연의 순리다. 원주의 장일순 선생은 아파 누웠을 때 투병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분에게 병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병과 죽음은 철저히 박멸의 대상이 되었다. 죽을 때까지 병과 싸워야하는 줄 알고 있다.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현대 의학은 부정한다. 그래서 늙고 병들면 온갖 의료장비에 매달려 생명만 연장되는 처량한 존재들이 되어가고 있다.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사는 것만 찬양되는 문명은 그 자체로 천박하고 불경스럽다. 질병은 오직 퇴치되어야 할 대상이다. 현대인은 인간답게 품위 있게 죽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새로운 질병을 찾아내고 끝없이 팽창해야 하는 현대 의료산업이 준 부정적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리치는 학교에 의한 교육 독점도 비판했다. 그는 학교교육 자체를 거부하고 교육이라는 말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현대 문명세계나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두 축이 학교와 병원이라고 믿었다. 민중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바로 학교교육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병은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듯, 공부는 학교에 가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국가가 준 자격증이 아니면 어디 가서 밥벌이를 할 수도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일리치가 반대한 것은 인간을 시스템적으로 관리하면서 민중의 자치능력을 훼손시키는 현대문명의 사악함이었다. 그는 문명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것에 대해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반대 입장을 취했다.


일리치의 사상은 내가 보기에 노자와 장자가 꿈꾼 세상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혁명적인 전복, 자연과 생명 중심주의 사상, 소규모 자치적인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는 것 등이 닮아 있다. 또 자연과 인간의 선함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 사상의 바탕이 되고 있다. 또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연의 원리에 반하는 인위적인 것을 부정한다. 일리치는 국가에 의한 제도적인 복지체제도 비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스한 가슴으로 만나는 관계가 사라진 테크놀로지의 세계로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삭막하게 변해가는 지금의 양로원이나 복지병원의 풍경에서 벌써 그런 징조가 보인다. 나는 일리치나 노자, 장자에게서 제도와 문명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읽는다. 그리고 진실로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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