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성이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다. 그러나 위장이 약한 탓에 약간은 조심해야 하는 음식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 않다면 먹는 것에 대해 까다롭지는 않다. 그런데 한때 보신탕을 멀리 한 적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개와 연관된 껄끄러운 사건이 벌어지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겨울에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를 혼낸다고 신발을 던졌는데 개다리에 정통으로 맞으면서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뜻하지 않은 변고에 무척 마음이 아픈 터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묘하게도 외할머니가 밖에 나가셨다가 자전거에 부딪쳐 다리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아흔이 넘으셨던 외할머니는 그 사건 때문에 엄청 고생하셨다. 두 사건은 아무 연관도 없는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말 못할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번이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개와 관계된 좋지 않은 일들이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러니 개고기를 먹는 것이 꺼림칙해지면서 멀리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개를 좋아한 적이 없다. 어렸을 적에 집에서 기르던 큰 똥개는 더럽고 무섭기만 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애완견을 봐도 될 수 있으면 멀리 피한다. 꼬리를 치는 주인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 반면에 낯선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 같은 게 싫다. 대신에 독립적이면서 늘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는 좋아한다. 고양이는 집주인에게조차 고분고분하지 않다. 이러니 처음부터 개고기를 먹는 데에 거부감이 없었다. 개나 소나 육식의 재료로서는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 30대 중반에 수술을 하고 나서는 회복에 좋다고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그때는 몇 달 동안 냉장고에 개고기가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기력이 쇠한다 싶으면 보신탕으로 원기를 얻었다. 집 가까이에는 자주 가는 단골집이 있었다. 보신탕이 정말 몸에 좋은지 객관적으로 확인은 못하지만 먹고 나서 속이 편안한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위장이 약하다보니 음식에 민감한 편이다. 다른 고기를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많은데 개고기는 그렇지 않다. 속이 편안하고 든든하니 자주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개와 연관된 좋지 않은 징크스가 생긴 이후로 약 10년 정도 보신탕을 끊었던 셈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지만 가족의 불행과 연결된다고 여겨지는데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먹지 않는다고 문제 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취향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재작년에 아내가 수술을 받게 되고 역시 건강 문제로 아내가 보신탕을 먹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가끔씩 보신탕집에서 탕을 사다가 집으로 가져다주고, 또 보신탕집에도 함께 가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같이 먹게 되었다. 10년 동안의 금기가 어느 순간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단골집이 생길 정도로 애호하는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내와 동행이다. 우리에게 보신탕은 말 그대로 보신탕이다. 둘 중 하나라도 기력이 쇠한 것 같아 보신탕 얘기를 꺼내면 둘이 함께 나간다. 탕을 한 그릇씩 비우면 왠지 힘이 나는 것 같다. 과학적 분석으로는 개고기에 특별한 성분이 있는 게 아니라지만, 세상을 사는 게 과학적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 음식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혐오하는 식품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미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문화고 습관이며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소를 신성시하여 소고기를 먹지 않기도 한다. 개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의 기준을 남에게까지 강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또 나와 다른 사람을 야만스럽게 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잘못하면 서양의 어느 여배우처럼 자신의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오만방자해질 수 있다. 그러나 개냐 아니냐가 아니라 좋은 먹을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개를 식용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것은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보신탕 예찬론자는 아니다. 고향마을에 개 사육장이 있는데 그 옆을 지날 때는 솔직히 보신탕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좁은 장 안에서 사육되고 있는 개들을 보면 연민의 마음이 아니 생길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소나 돼지나 닭 등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생각이다. 키우고 죽이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실제 보면 상상 이상이다. 그럴 때는 가능하면 육식을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는다. 특히 개의 경우는 위생적인 면에서 더 엉망이다. 국가에서도 개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는 것 같다. 공식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나라라는 낙인은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인가 보다. 앞으로 G20 회의를 앞두고 보신탕을 먹으러 뒷골목을 찾는 사람들은 더욱 알아서 조신하게 행동해야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보신탕이 김치나 막걸리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식품 브랜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온다는 말은 세상살이의 불변의 원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은 보신탕 한 그릇 하러 잠깐 외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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