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가 서슬 푸르던 1970년대 초반에 대학 생활을 했다. 나의 20대는 유신시대와 궤적을 같이 한다. 되돌아보면 데모와 돌멩이, 최루탄 가스 냄새, 그리고 휴강, 휴교로 점철된 대학 생활이었다. 수업 몇 시간 하지 못하고 학기를 마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정치나 사회의식이 부족했었던 탓에 정권의 폭력이나 반민주적인 시국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했다. 그저 수업을 안 하는 게 좋았고 반정부데모에는 대개 방관자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참 부끄러웠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한승헌 변호사님의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이라는 자서전을 읽으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하여 어두웠던 우리의 현대사를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가 얼마나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는지를 정작 그 시대에 살고 있을 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포악한 정권과 맞서 싸우며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선배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모두가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기만 했다면 우리는 아마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그 과정을 망각하기가 쉽다. 이건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지하기 때문에든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든 불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일종의 죄악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느꼈다.
시국사건 변호인으로서 선생님의 일생은 잘 알려져 있다. 책을 읽어보면 초지일관한 선생님의 삶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의 여유와 유머가 인상 깊다. 특히 유머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썼을 정도로 선생님은 유머의 달인이신 것 같다. 감기에 걸리면 어쩌다 오래 가는 수가 있단다. 이럴 때, 자네 감기 아직도 안 나갔느냐고 친구가 물으면, “내 감기는 주한미군이네. 한번 들어오더니 나갈 줄을 몰라.” 이런 대답으로 함께 웃으면, 감기도 따라 웃다가 나가버린다고 한다. 변호사님은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쓰고, 사람도 잘 사귀고, 다방면에 팔방미인이신 것 같다. 그러면서도 권력에 기생하지 않으면서 평생을 시국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변론과 저항 정신으로 일관하셨으니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은 책 내용의 대부분이 선생님이 담당했던 사건 위주로 되어 있어 다른 부분이 소홀해진 점이다. 좀 더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얘기들이 많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유명했던 사건들을 접하며 그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는 자책이 많이 되었다. 책에는 ‘민중교육’지 사건도 나오는데 당시 현장에서 내가 한 짓거리들을 돌아보니 무척 창피하다. 그저 착하게 사는 것 같이 보인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리고 ‘강자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지식인의 위험에 대해 말하는 선생님의 경고는 새겨둘 만하다.
‘지식인은 그들이 갖는 상당한 지식과 통찰력을 통해서 오히려 창백해지고 소심해지기 때문에 역사와 민중으로부터 괴리된 예가 많았다. 따라서 역사적인 안목을 갖추고 동시대인의 민중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하는 각성을 통해서 지성인으로 격상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강자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