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6

공상 / 구중서

고향 마을 외진 터에 빈집 하나 있을까 종중 땅에 있던 집 맡아서 들어가 헌 데를 황토로 발라 누울 방을 마련할까 흙 마당 울 밑에 아욱이랑 호박 심고 여기저기 나는 잡초 자라게 버려두고 봉당 위 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좋겠네 뒷산의 어느 골짝 샘솟는데 있으련만 물길을 끌어대면 곡수연 터 되려나 도회의 친우가 오면 술잔을 띄워볼까 - 공상 / 구중서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을 산책하다가 만난 시다. 요사이 내 공상과 닮아 반가웠다.어디 외진 터에 낡은 집이라도 있지 않을까 열심히 두리번거리지만 마음을 당기는 데는 아직 없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는 내 앞에 나타나리라. 인적 끊긴 산속에 살다 보면 사람과 사람의 소리가 그리워지기도 할까? 제발 그래 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12.06.20

화려한 공상

잠자리에 들어서 억지로 공상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웃 덕택이다. 한밤중의 소음을 견디기 위해서는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수밖에 없다. 책을 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게 더 낫다. 공상은 화려하고 자극적일수록 좋다. 요사이는 호화유람선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상상을 한다. 어떤 행운이 찾아와 가장 크고 화려한 선실이 공으로 주어졌다. 야외 수영장까지 딸려 있다. 거실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세계의 일품요리가 끼니마다 제공된다. 예쁜 아가씨의 룸서비스를 받으며 어느 왕에 부럽지 않은 여행을 한다. 유람선이 항구에 정박하면 특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모습을 그린다. 이런 상상은 마취제로 작용해 위층 소음을 잠시 잊는다...

길위의단상 2012.02.26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닷물에 텃밭 떠난 배추 같은 생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얻어 타고 먼 바다 휭, 하니 돌다 왔으면,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

시읽는기쁨 2010.09.09

즐거운 공상

지난 주 로또에서 1등이 나오지 않아 금주의 당첨금이 250억이나 된다는 것이 사무실에서 화제가 되었다. A는 1만 원씩 돈을 모아 공동으로 로또를 사 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시큰둥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로또에 당첨이 되고 거액이 손에 들어오면 무엇을 할까라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이나마 모두가 즐거웠다. 아마도 내가 1등 당첨이 되면 제일 먼저 사직서를 던질 수 있다는 게 가장 통쾌할 것 같다. B의 얘기로는 당첨된 사람들이 3, 4 년 정도 마음껏 놀다가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 직장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건 차후의 일이다. 당첨금의 반 정도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하고, 또 일부는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싶다. 공짜로 들어온 돈이니 별로 아..

길위의단상 2008.06.20

엉뚱한 상상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외진 곳에 숨어들고 싶다. 한 네닷새 그곳에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따스한 사람과 한 쌍의 짐승이 되어 빈둥거리고 싶다.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에서 작은 이불 펴놓고, 졸리면 잠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가져간 몇 권의 책이나 넘기며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모습으로 지내보고 싶다. 바닷가 쓸쓸한 곳에 그런 집 한 채 없을까. 낮이면 주인 내외는 바다로 고기잡이 나가고 텅 빈 집, 우리 둘이 남아원껏 게으름의 사치를 부릴 수 있는그런 방 한 칸 어디 없을까. 그 작은 왕국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를 누려보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할 일 없이, 눈과 귀만 열어놓은 채...

길위의단상 2007.12.16

비 오는 날의 공상

봄비가 내린다. 어제 저녁에 시작된 비가 밤새 내리더니 오늘 낮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이슬비로 변해서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안개에 잠긴 듯 희뿌옇다. 며칠간 계속되던 더위가 도망을 가 버렸다. 또한 농촌에는 고마운 단비가 될 것이다. 밭에 심은 모종들이 건조한 태양의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생기를 되찾을 것이다. 봄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공상에 잠긴다. 이런 날은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서 한적한 바닷가에 가고 싶다. 그리고 인적 드문 해안가를 쓸쓸히 걷고 싶다. 옆에는 사랑하는 그녀가 있다. 말이 없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 반가운 사람이다. 바닷가 작은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 마음까지 따스해질 것이다. 넓은 유리창으로는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낙..

길위의단상 2005.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