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5

혼자 논다 / 구상

이웃집 소녀가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무렵하루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그러길래- 유명이 무엇인데?하였더니- 몰라!란다. 그래 나는- 그거 안 좋은 거야!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 보면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잘 했어! 고마워!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혼자 논다 / 구상  '혼자 노는 소년' - 이웃에 사는 소녀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 중에 '혼자 노는 소년'에 가..

시읽는기쁨 2024.07.02

가장 사나운 짐승 / 구상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 가장 사나운 짐승 / 구상 지난번 중국에 다녀올 때 공항에서 안내자가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흉기가 아닌가?" 어렸을 때 사랑방에 모인 우리를 보고 할아버지가 물었다. "산..

시읽는기쁨 2012.08.10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 꽃자리 / 구상 해가 바뀌었다. 새 희망과 결심으로 잠깐 설레는 아침이다.이 시를 2010년의 첫 시로 읽는다.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내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삶에 좀더 너그러워지기,덜 아등바등거리기, 그리고 고맙고 기쁘게 살고 싶다. 올 한 해.....

시읽는기쁨 2010.01.01

오늘 /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 / 구상 구도(求道)의 길이란 종국에는 '존재의 기쁨'에이르는 것이 아닐까. 그 단계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삶은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희열의 표현이 된다. 무엇을 이루었다거나 무엇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행복이 된다. 나에게 주어진..

시읽는기쁨 2007.10.23

은총에 눈을 뜨니 / 구상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는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 은총에 눈을 뜨니 / 구상 '종교'보다는 '종교성'이라는 말이 좋다. '축복'보다는 '은총'이라는 말이 좋다. 벽돌로 지은 사원보다는 내 마음 안 그분의 거소가 더 진실되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

시읽는기쁨 2006.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