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6

도봉 / 박두진

산(山)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도봉(道峯) / 박두진 A로부터 박두진 시인을 뵌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A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 그렇다면 60년대 후반이었겠지 - 학교 '문학의 밤' 행사 때 시인이 오셔서 문학반 친구들이 낭송한 자작시를 강평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의 첫 ..

시읽는기쁨 2022.11.12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뒤돌아봐도 그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붉은머리오목눈이'를 알게 된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이름을 불러주게 되다니, 그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자책이 되었다. 이 동시에 나오는 '비비새'가 붉은머리오목눈이다. 또는 '뱁새'라고도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에 나오는 바로 그 뱁새다. 살펴보니 비비새, 즉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자주 눈에 띈다. 얼굴이 통통한 게 무척 귀엽게 생겼다. 대체로 갈대 덤불 속에서 무리를 지어 지낸다. 그런데 여기 묘사된 비비새는 특이하다. 혼자서 그것도 전봇줄 위에 있는 경..

시읽는기쁨 2021.05.02

하늘 /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 하늘 / 박두진 박두진 시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다. 박두진 문학길을 걸으며 이 시를 찾아 읊었다. 요사이는 휴대폰이 있으니 편리하다. 젊었을 때 무척 좋아했던 시였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음을 새삼 알아챘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호수를 따라 오붓하게 길이 나 있었다. 시인이 말하는 호수를 여기 금광호수로 착각한들 어떠랴. 호수는 지상의 꿈, 하늘은 천상의..

시읽는기쁨 2019.10.17

박두진 문학길

안성에 간 길에 '박두진 문학길'을 걸어보다. 박두진 시인의 고향이 안성이고, 말년의 집필실이 이곳 금광호수변에 있었다. 문학관을 비롯해서 시인을 기념하는 공간이 호수 주변에 만들어졌다. 박두진 문학길도 그중 하나다. 시인이 4.19 혁명 직후 연세대에서 해직되었고, 박정희 정부 때는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반대한 서명 문인 1호였다고 한다. 당대 현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문단 정치와도 무관하게 자신만의 길을 오롯이 걸은 분이다. 혁명 뒤에 쓴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라는 시를 보면 선생의 의기를 느낄 수 있다. 시의 한 구절은 이렇다. '우리들의 목표는 조국의 승리 우리들의 목표는 지상에서의 승리 우리들의 목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 인간애의 승리인 인민들의 승리인 우리들의 혁명을..

사진속일상 2019.10.15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 박두진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 뿜는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도 못막는 우리들의 피대열을 흩을 수가 없다.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민족, 내가 사는 조국이여 우리들의 젊음들 불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내린 악으로 불순으로 죄악으로 숨어내린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의 썩은 것을 씻쳐 내는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사뤄 젊음이여! 정한 ..

시읽는기쁨 2015.04.20

시인 공화국 /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

시읽는기쁨 201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