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칠환 10

한평생 /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고 지음도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뿐 숨만 남았구나.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 한평생 / 반칠환 본디 짧고 긴 것이란 없다. 짧다고 보면 짧은 것..

시읽는기쁨 2023.06.01

봄 /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봄 / 반칠환 마술사 같은 요리사의 솜씨다. 한쪽에서는 팡팡거리며 팝콘도 터진다. 풍성한 자연의 식탁이 펼쳐지고, 우리는 그저 수저만 잡으면 된다. 연례행사로 이런 대접 받아왔으니 의례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기적이 아닌가. 바라보는 풍경에, 코를 간지리는 향기에, 가슴 콩당콩당 뛰어야 할 감사며 경외가 아닌가.

시읽는기쁨 2018.04.07

외딴 유치원 / 반칠환

아랫목에 밥 묻어 놨다.... 어머니, 품 팔러 새벽 이슬 차며 나가시고 막내야, 집 잘 봐라 형, 누나 학교 가고 나면 어린 나 아버지와 집 지키네 산지기 외딴집 여름해 길고 놀아줄 친구조차 없었지만 나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네 외양간에 무섭지만 형아 같은 중송아지, 마루 밑에 양은냄빈 왈칵 물어도 내 손은 잘근 씹는 검줄이, 타작 끝난 콩섶으로 들락거리던 복실꼬리 줄다람쥐, 엄마처럼 엉덩이 푸짐한 암탉도 한 마리 있었다네 아아 낯설고 낯설어라, 세상은 한눈 팔 수 없는 곳.... 원생은 나 하나뿐인 외딴 유치원, 솔뫼 고개 우리 집 아니 아니, 나 말고도 봄에 한배 내린 병아리 떼가 있었네 그렇지만 다섯살배기 나보다 훨씬 재빠르고 약았다네 병아리 쫓아, 다람쥐 쫓아 텃밭 빠대다보면, 아버지 부르시네 ..

시읽는기쁨 2016.06.01

봄 펜팔 / 반칠환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

시읽는기쁨 2016.04.24

먹은 죄 /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먹은 죄 / 반칠환 생명은 다른 생명으로 산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느라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야 했던가. 우리는 그걸 먹이사슬이라 부른다. 인간계 안에도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의 몫을 뺏는 게 불가피하다. 어쩌면 자연계보다 더 냉혹하다. 현대의 원죄는 '먹은 죄'가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율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군중에..

시읽는기쁨 2014.10.21

자벌레 / 반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

시읽는기쁨 2013.07.26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소총으로 쏘아 진흙 밭에 빠뜨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퍽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들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네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남북한이 ..

시읽는기쁨 2013.03.13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 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 어떤 채..

시읽는기쁨 2009.02.14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다시 새해 첫날이 열렸다. 어제의 아쉬움이 오늘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변했다. 날든, 뛰든, 아님 앉은 채 그대로든 모든 존재들에게 새해 첫날은 기적처럼 똑 같이 주어졌다. 여기엔 잘난 이, 못난 이의 차별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매일매일이 첫날처럼 설레임과 경이로 가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의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잔뜩 흐린 날씨처럼 오늘 우리 집엔 무겁게 저기압이 드리워져 있다. 새벽 꿈자리마저 뒤숭숭하더니 아침 밥상 자리 작은 데서 일이 터졌다. 하필 새해 첫날에..... (그런데 이 시에서 재미있는 점은 가만히 ..

시읽는기쁨 2006.01.01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세상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나도 불쌍하고 세상도 불쌍하다. 병든 세상을 아파하는 깊은 슬픔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측은지심은 동정심이 아니라 인간의 따스하고 순수한 의식이다.사물의 깊은 면을 바라볼 때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세상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그래서 다른 존재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며 행복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이다. 맹자(孟..

시읽는기쁨 200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