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5

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 가벼히 / 서정주 '가볍게'나 '가벼이'가 아니고'가벼히'다. 시인이 골라 썼을 이 특별한 시어에 자꾸 눈이 간다. '맞날' '인젠' '새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가 주는 분위기와 시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사랑이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풀잎사귀 하나 같은 사랑이라면 거센 폭풍우가 닥쳐도 누울 뿐 부러지지는 않는다. 인연의 소중함도 그러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일 뿐 거기에 천만 금의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가벼히 한눈파는..

시읽는기쁨 2024.03.1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살라고 한다. 그것도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바람 속에는 연꽃 향기 시들고 섭섭한 마음도 색이 바랜 뒤일 것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바람은 돌고 돌아 다시 연꽃밭을 지나갈지 모른다. 전생에서 수없는 만남이 있었음을 바람은 눈치채지 못하리라. 향기를 머금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바람은 조금은 섭섭해..

시읽는기쁨 2022.05.23

뻔디기 / 서정주

예수의 손발에 못을 박고 박히우듯이 그렇게라도 산다면야 오죽이야 좋으리오? 그렇지만 여기선 그 못도 그만 빼자는 것이야. 그러고는 반창고나 쬐끔씩 그 자리에 붙이고 뻔디기 니야카나 끌어 달라는 것이야. "뻐억, 뻐억, 뻔디기, 한봉지에 십원, 십원, 비 오는 날 뻔디기는 더욱이나 맛좋습네." 그것이나 겨우 끌어달라는 것이야. 그것도 우리한테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국민학교 6학년짜리 손자놈들에게까지 이어서 끌고 끌고 또 끌고 가 달라는 것이야. 우선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제에길! - 뻔디기 / 서정주 서정주 시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 시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정말 미당이 맞는지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나는 시 작품보다는 시인의 삶과 의식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미..

시읽는기쁨 2016.01.23

기도 / 서정주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합니다 주여 (이렇게밖엔 당신을 부를 길이 없습니다)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 기도 / 서정주 내 옆 동료는 미당을 비아냥거르듯 늘 말당이라고 부른다. 그의 친일 행적만 아니라 그 뒤에도 정권에 빌붙는 처신 때문이다. 시에서 감동을 받더라도 시인의 실제 모습을 알고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말 따로 사람 따로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시인에 해당될 때는 더욱 실망하게 된다. 시인이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처럼 아름답게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시읽는기쁨 2007.06.02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국화 옆에서 / 서정주 누군지 이름이 기억하지 않지만 어느 물리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여기서 꽃 한 송이를 꺾으면, 저 멀리 있는 별이 흔들린다." 아마 이물리학자는 우리 우주계가 서로간의 만유인력에 의해 얽혀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물질세계만 이렇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세계나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세계도 이..

시읽는기쁨 2005.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