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음 4

꼭대기의 수줍음

능선에서 자라는 나무를 멀리서 보면 키가 잘 맞추어져 있다. 누구 하나 우뚝 서려 하지 않고 골고루 햇빛을 받으며 자라난다. 비슷한 현상으로 숲에 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 나무들이 제 영역을 지키는 걸 볼 수 있다.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각자의 영역을 적당하게 확보해서 공간을 골고루 나눠 쓰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꼭대기의 수줍음'이라 명명했다. 나무는 자기 절제를 할 줄 안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나 제일 현명한 선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저 혼자만 잘살려고 싸우다가는 함께 파멸이라는 걸 나무는 안다. 인간 세상과 너무 비교된다. 나무를 시인이요, 철인(哲人)이라 불러 마땅하다. 우리나라 국민의 90%가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

참살이의꿈 2018.09.16

위대한 수줍음

'수줍다'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어디서도 수줍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그렇다. 요사이 아이들은 너무 당돌하고 되바라져 있다. 아예 인종이 변한 듯하다. 우리가 클 때만 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얼굴도 잘 들지 못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해도 손을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면서도 먼저 나서기 바쁘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어려워하는 태도가 있다'가 '수줍다'의 뜻이다. 소녀라고 하면 연상되는 게 수줍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여학생들을 보면 수줍음과는 영 거리가 멀다. 다들 선머슴으로 변한 것 같다. 언어는 왜 그렇게 난폭한지 모르겠다. 부끄러워할 줄도 어려워할 줄도 모른다. 고운 얼굴을 다시 쳐..

참살이의꿈 2014.12.28

시치미떼기 / 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 시치미떼기 / 최승호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두는 인식표였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

시읽는기쁨 2012.07.02

무대공포증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떨리고 두렵다. 특히 부담이 되는 자리라던가, 시끌시끌한 오락성의 자리일수록 더한 편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하얘져서 마음에 담은 얘기조차 제대로 전할 수 없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향은 있겠지만 나에게는 정도가 심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두 사람과는 서로 교감하며 대화 나누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괜히 무언가가 불편하고 스스로 의기소침해져 버린다. 내 유년과 소년 시절을 돌아보면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나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일찍 학교에 가서 한글이나 깨우치라면서 초등학교에 가입학..

길위의단상 2006.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