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에서 자라는 나무를 멀리서 보면 키가 잘 맞추어져 있다. 누구 하나 우뚝 서려 하지 않고 골고루 햇빛을 받으며 자라난다. 비슷한 현상으로 숲에 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 나무들이 제 영역을 지키는 걸 볼 수 있다.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각자의 영역을 적당하게 확보해서 공간을 골고루 나눠 쓰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꼭대기의 수줍음'이라 명명했다.
나무는 자기 절제를 할 줄 안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나 제일 현명한 선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저 혼자만 잘살려고 싸우다가는 함께 파멸이라는 걸 나무는 안다. 인간 세상과 너무 비교된다. 나무를 시인이요, 철인(哲人)이라 불러 마땅하다.
우리나라 국민의 90%가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남이 잘되는 걸 배 아파하는 국민성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름다운 성공에는 우리도 박수를 보낼 줄 안다. 재벌의 배후에는 정경유착이나 탈법이 있었다. 아직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재산 형성 과정도 문제지만 부자들의 행태가 더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부자는 보기 힘들다.
'꼭대기의 수줍음(Crown Shyness)' - 참 아름다운 말이다. 현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수줍음이 사라진 세상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 뻔뻔해졌다. 이웃에 대한 배려나 예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꼭대기의 수줍음'은 자기 절제의 미학이 아닐까. 나무에서 배우는 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