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5

어떤 실수

겨울이 되면 피부가 건조해진다. 특히 다리 부위가 간지럽고 꺼칠하다. 보름 전쯤 아내에게 피부 보습제를 부탁했더니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발라보니 전과 달리 끈적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좋은 거라고 말했으니 의심 않고 두 주 정도 열심히 사용했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자주 긁게 되었다. 다리를 살펴보니 붉은 반점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수상쩍어서 병을 봤더니 이런, 이건 보습제가 아니라 바디와셔였다. 샤워하고 비누기를 없앤 다음에 다시 비누를 잔뜩 바른 셈이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 전체에 바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병을 보니 착각하게도 생겼다. 상표 이름만 영어로 크게 적혀 있고, 내용물에 대한 한글 설명은 깨알 같은 ..

길위의단상 2020.12.15

9단의 자살골

지난 4월 3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19기 여류국수전 결승에서 보기 힘든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박지은 9단[흑]과 김채영 초단[백]이 1:1이 된 가운데 벌어진 마지막 세 번째 대국이었다. 바둑은 박지은 9단의 승리로 굳어진 가운데 몇 군데만 메우면 종국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박지은 9단이 무심결에 우상귀의 흑돌을 이은 것이다. 바둑 초보도 알 수 있는, 놓아서는 안 되는 자충수였다. 김채영 초단은 공짜로 들어온 흑돌을 들어냈고 바둑은 역전되었다. 뒤늦게 착각을 알아차린 박지은 9단은 망연자실했다. 큰 시합에서 9단이 저지른 충격의 자살골이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아마추어처럼 온정에 기대거나 물릴 수 없다. 바둑 한 수의 치열함을 조치훈 9단의 '목숨을 걸고 둔다..

길위의단상 2014.04.08

연이은 착각

두 번의 연이은 착각을 했다. 지지난주에는 결혼식장에 갔더니 혼주가 엉뚱한 사람이 서 있었다. 청첩장을 꺼내 보니 축하해줘야 할 친지 결혼식은 다음날이었다. 날짜를 하루 착각한 것이다. 지난주 결혼식은 식장에 갔더니 이미 끝난 뒤였다. 시간을 두 시간이나 오해해 주인공을 보지도 못하는 실례를 했다. 깜빡하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나 이렇게 연달아 실수하고 보니 내 정신이 녹슬어가는 게 실감 난다. 운전을 해보면 안다. 내비의 안내를 받지만 엉뚱한 길로 들어설 때가 잦다. 여러 갈래 길에서 정확한 결정을 못 내린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감각만으로도 길을 잘 찾아갔다. 이제는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고작 선택한 게 정답이 아니다. 총기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도로가 복잡해져서 그렇다고 자기 위안을 해 보지만 자..

길위의단상 2013.11.15

이삿날의 해프닝

이사 가는 날이었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집 주인,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와 함께 모였다. 집 주인한테서 전세금을 돌려받았는데 1억7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10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이었다. 그리고 세입자에게 지난달의 관리비 등으로 10만 원짜리 수표 넉 장을 건넸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났다. 큰 돈을 가지고 다니기가 뭣해 일단 은행에 넣기로 했다. 창구에서 수표를 내미는데 이런, 1억7천만 원짜리 수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디 흘려버린 게 아닌가, 어떻게 하지, 이 일을 어쩌지. 하필 제일 큰 덩치가 없어지다니. 가슴이 쿵쾅거리고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만약 이 돈이 날아간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둥대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해서 수표를 세어보니 10만 원권 일곱 ..

길위의단상 2011.04.20

청계수 침례

한 달 전에 부끄러운 경험을 했다. 직장 동료 몇이서 함께 한 술자리에서 대취하여 청계천에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청계천 물에 빠진 것이다. 물은 얕았지만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큰대자로 엎어졌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잠수를 해버렸다. 당시는 한밤중이었지만 도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 주변에 있었는데, 물에 빠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창피해서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어디를 가겠는가, 한참을 앉아서 옷을 대략 말리고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술에 취했는지 그 전부터 필름이 끊어졌고, 지금도 물에 빠진 후의 상황만 조금 기억 날 뿐이다. 아마 그때 옆에 K가 없었다면 더 추한 꼴을 보였을지 모른다. 그 뒤에는 웃으며 ..

참살이의꿈 2007.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