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이삿날의 해프닝

샌. 2011. 4. 20. 11:19

이사 가는 날이었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집 주인,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와 함께 모였다. 집 주인한테서 전세금을 돌려받았는데 1억7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10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이었다. 그리고 세입자에게 지난달의 관리비 등으로 10만 원짜리 수표 넉 장을 건넸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났다.

큰 돈을 가지고 다니기가 뭣해 일단 은행에 넣기로 했다. 창구에서 수표를 내미는데 이런, 1억7천만 원짜리 수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디 흘려버린 게 아닌가, 어떻게 하지, 이 일을 어쩌지. 하필 제일 큰 덩치가 없어지다니. 가슴이 쿵쾅거리고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만약 이 돈이 날아간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둥대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해서 수표를 세어보니 10만 원권 일곱 장이 남아있었다. 그때 세입자에게 10만 원권 수표 넉 장을 건넸는데 실수로 1억7천만 원짜리가 섞여간 게 분명했다. 허둥지둥 부동산 사무실로 전화하고는 그리로 달려갔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그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혹 그 사람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아니면 벌써 다른 데에 사용해 버렸다면 어떡하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사무실 직원이 수없이 전화를 한 끝에 겨우 연결이 되었다. 수표 확인을 부탁하니 예상대로 거기에 섞여 있었다. 그 사람도 수표를 무심코 받아서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닌 모양이다. 그 사람도 놀랐을 것이다. 살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세금으로 받은 1억7천을 잃어버렸다면 아마 제 정신으로 있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도난을 당하거나 분실이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한 순간이었다.

떠나갔던 거금이 몇 시간 뒤에 다시 돌아왔다. 안 그래도 바쁜 날이었는데 이런 해프닝 때문에 더 정신이 없었다. 수표가 우리한테서 부동산 직원에게, 다시 세입자에게 넘어가는 동안 액수를 아무도 체크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기지 않을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은 한 바탕 웃는 것으로 끝났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사람 사는 게 사소한 실수 하나로 방향이 완전히 틀어질 수 있다. 아무리 거창한 일도 티끌만한 데서 시작된다. 작은 생각, 작은 계기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런 무수한 분기점과 고비를 지나면서 여기까지 와 있다. 한 고비가 지나서 안도하면 더 큰 고비가 나타나는 게 인생이다. 인생은 아슬아슬한 파도타기다. 세상살이가 그러한 걸 어찌하랴. 너무 애 태우지 마라,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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