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부끄러운 경험을 했다. 직장 동료 몇이서 함께 한 술자리에서 대취하여 청계천에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청계천 물에 빠진 것이다. 물은 얕았지만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큰대자로 엎어졌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잠수를 해버렸다. 당시는 한밤중이었지만 도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 주변에 있었는데, 물에 빠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창피해서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어디를 가겠는가, 한참을 앉아서 옷을 대략 말리고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술에 취했는지 그 전부터 필름이 끊어졌고, 지금도 물에 빠진 후의 상황만 조금 기억 날 뿐이다. 아마 그때 옆에 K가 없었다면 더 추한 꼴을 보였을지 모른다.
그 뒤에는 웃으며 청계수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농담을 할 정도가 되었지만 몇 년만에 대취하고 실수를 한 그 경험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때 술을 마신 이유는 거시기 때문이었다.인간은 어떤 몰두할 대상이 사라지면 또 다른 대체물이 필요한 것 같다. 밤골을 보내고 허전해진 빈 여백에 거시기가 나타나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사실 거시기는 몇 년 전부터 그 정체를 드러내며 나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고 해야 맞다.
며칠 전에는 운전하던 중 차를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이 사고의 바탕에도 역시 거시기가 깔려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거시기는 부드럽게 다가와서 내 혼을 사로잡아 버렸다. 나는 지금 거시기의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쪽 몸은 자꾸 그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한 달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은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심리적 측면에서는 어떤 공통된 요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끌림과 저항의 가운데에서 흔들리다 보니 정신은 산만하고 생활은 무질서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생긴 이번 일들은 어쩌면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경고일 수도 있다. 마음의 정리가 되지 못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는다면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또 생길 것이다. 그러나 피하려고 해도 그것이 내 의지대로 손쉽게 되는 일도 아니다. 도리어 몸부림을 칠수록 함정에 더 빠져들 수도 있다.
인생은 불연속적인 마디로 되어 있다. 다음 마디로 넘어가는 고비에서마다 누구나 예외없이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바로 그런 전환의 때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럴 때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아둥바둥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지금은 우산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오는 비를 맞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선악이나 호오의 판단없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 보기, 이것이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으면서도 그나마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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