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발전하는가' 또는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질문을 흔히 하게 된다. 이때 질문을 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발전이나 진보의 개념이 무엇인지가 우선 명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의미 없는 논쟁만 남을 뿐이다.
후배 K와의 대화에서는 늘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자기 나름대로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지만 결코 독단적이지도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의 폭넓고 깊은 인문학적인 소양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진보의 기준을 인간이 얼마나 지혜로워졌느냐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어떻게 보면 인간 역사는 쉼없는 과오의 반복이다. 지난 역사에서 배우고 깨우친 것이 있을진대 미련스럽게도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들이다. 지식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인간이 과연 얼마나 지혜로워졌는지는 의문이다. 도리어점점 더탐욕스러워지고 영악해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현생인류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느니 지혜롭다느니 자화자찬하는 이 병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그런 자고심과 자만심이 현대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도 재앙이 되고 있다.
정말 지혜로운 인간들이라면 신자유주의 물결이 창궐하는 이런 비인간적 체제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다수는 여기에 저항해야 옳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알지 못할 어둠의 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도 된다. 세상은 갈 데까지 갔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뒤에야 다시 정신을 차릴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번에도 다시 제 자리로 찾아올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인간은 시간의 모래 위에 헛된 발자국만 반복해서 찍고 있는지 모른다. K가 말한 대로 '지혜'라는 측면에서는 진보는 되고 있지 않다는데 동의한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고대의 노예제도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지능은 더 교묘한 억압과 착취의 수단을 개발하는데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결국 다시 인간 욕심의 문제로 귀결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터로 변한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어쩌지 못하는 탐욕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현대 문명과 지금의 체제가 인간 탐욕의 바탕 위에 건설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탐욕을 부추기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정, 성공, 도전, 재테크 등 그럴 듯한 미사여구가 충동질하는 것 또한 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진보란 이런 사회악과 부조리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세상의 건설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꿈을 그저 꿈으로만 그치게 하고, 현실은 그와 정반대의 길로 나가고 있다. 이러니 인간의 지혜와 역사의 진보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줄기차게 들리는 바보들의 넋두리가 그칠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