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5

유유히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12월 3일 이전에 고른 것이지만 묘하게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맞아떨어졌다. 어제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이 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광란의 칼춤'을 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그는 오로지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만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번 탄핵 과정에서 국회 앞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8년 전의 촛불 시위와 달리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많이 나왔다. 정치에 무관심한 MZ세대라고 폄하했었는데 내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를 축제 마냥 즐기는 그..

참살이의꿈 2024.12.15

헐렁한 게 좋아

몇 주 전에 아내가 겨울 티셔츠를 사 왔다. 색깔이나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사이즈가 95라고 포장지 비닐에 적혀 있어 더 확인하지 않은 채 라벨을 떼어버리고 옷장에 걸어두었다. 95나 100이면 내 몸에 잘 맞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옷을 꺼내 입으니 헐렁한 게 너무 컸다. 그제서야 옷에 붙은 사이즈를 보니 105였다. 포장지 표시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미 교환할 수도 없게 된 상태라 그냥 입기로 했다. 목에는 주먹 하나가 들락거리고 허리 부분은 몇 겹이나 주름이 졌다. 다행히 겨울 티셔츠라 겉옷 안에 숨어서 볼품을 따지지 않아도 되었다. 전에는 꽉 조이는 옷을 즐겨 입었다. 이 옷은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은 없지만 굉장히 편안하다. 한복을 왜 편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아마 ..

참살이의꿈 2016.02.16

성질머리하고는

참 묘하다. 나이가 들면 성격이 원만하고 부드러워질 것 같은데 안 그렇다. 도리어 까탈이 심하고 화를 잘 낸다. 나와 생각이 다른 걸 용납하지 못한다. 냇가의 돌도 세월이 흐르면 동글동글해지는 데 나는 반대다. 돌만도 못하니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내 단점은 참을성이 없고 욱하는 성질이다. 느긋하게 기다리지를 못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속에서 조바심이 나고 화가 치솟는다. 이것 때문에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싫은 소리도 자주 한다. 몇 분을 참지 못하고 금방 후회할 짓을 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주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가 심해진다는 데 있다. 마음 수양을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소갈머리가 좁쌀만 하다. 아내는 말한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도 닦는 흉내..

길위의단상 2014.09.11

국도 / 윤제림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탈것 하나가 세상 모든 탈것들을 줄줄이 멈춰 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든 꽃상여 하나, 찻길을 막아놓고서는 제 자신도 솔밭머리에서 제자리걸음입니다. 시동을 끄고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무는 버스 기사를 보고 레미콘 트럭이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 소리에 놀란 깃발과 사람들이 길 양편으로 흘러내립니다. 버스 기사가 차에 오릅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새댁 하나가 품에 안은 아이 손을 붙잡고 빠이빠이를 합니다. 멈췄던 차들이 가던 길을 갑니다.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코란도, - 국도 / 윤제림 "비스타리 비스타리", 4000 m 높이의 히말라..

시읽는기쁨 2010.01.27

Leisure / W. H. Davies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And stare as long as sheeps or cow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 Leisure / W. H. Davies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양이나 젖소들처럼 나무 아래 서서 쉬엄쉬엄 바라볼 틈 없다..

시읽는기쁨 2006.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