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14

내가 싫어지는 날

내가 싫어지면서 우울한 날이 있다. 그런 때는 운동화 끈을 매고 집 밖으로 나간다. 집안에 있으면 어두운 감정의 늪에 점점 빠져들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타박타박 걷다 보면 토닥토닥 나를 다독여주는 손길을 느낀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거야." 오랜만에 걸어보는 경안천이다. 경안천에는 한낮이 되었는 데도 아침 서리가 남아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겨울 햇빛을 정면으로 쬐며 남쪽으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날 수록 햇볕에 서리가 녹듯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진다. 못난 '나'가 내 안에서 그제야 미소를 짓는다. 두 시간여를 걷고 시장 안에 있는 단골 순댓국집에 들어간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오후라 식당 안은 손님 너덧 명이 있을 뿐 조용하다. ..

사진속일상 2019.12.24

괜찮아 /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시읽는기쁨 2017.12.27

누군가 슬퍼할 때 / 김현옥

친구의 눈에 눈물이 흐를 때 함께 울게 하소서 친구의 가슴이 고통으로 멍들 때 연민을 느끼며 그를 껴안을 수 있게 하소서 가난한 이웃의 어려움을 들을 때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의 궁핍함을 함께 걱정하고 그의 불안한 삶의 고뇌를 나누며 주머니를 털어 그와 나눌 수 있는 진실함을 주소서 무언가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거나 남들이 해결하리라 미루지 않고 저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함께 올바른 길로 나가기 위해 기꺼이 끼어들게 하소서 주님의 자녀인 제가 말만 앞선다는 소리를 들어 당신께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 누군가 슬퍼할 때 / 김현옥 수녀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마지막 통화하고 나서 벌써 4년이나 흘렀네요. 지금도 수녀님이라 불러야 ..

시읽는기쁨 2014.02.15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줄이 내려오고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

시읽는기쁨 2013.08.29

위로

어른을 위한 가슴 따스한 동화다. 이철환 님이 글을 쓰고 그림도 직접 그렸다. 파란나비 피터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붉은꽃을 따먹은 후 원했던 반쪽붉은나비가 된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친구들은 떠나가고 피터는 혼자가 된다. 외톨이가 된 피터는 숲의 이웃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통해 위로를 받고 인생의 지혜를 얻는다.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진다. 아파본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에는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주옥같은 글이 많다. 힘들고 어려울 때 언제라도 꺼내어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싶은 것들이다. 잔잔한 여운이 남는 책이다. 나무의 말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서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네가 진정으로 높이를 갖고 싶다면 깊이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돼..

읽고본느낌 2012.10.13

야곱 신부의 편지

짧고 간결하지만 울림이 큰 영화다. 상영시간이 70분 정도고, 등장인물도 고작 세 사람(야곱 신부, 레일라, 우체부)이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의 외로움, 연약함, 용서, 소통,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레일라는 어릴 때 엄마의 폭력에 시달렸다. 어린 그녀를 구해 준 것은 언니였다. 언니는 작은 몸으로 엄마를 막으며 동생을 보호했다. 그런데 결혼한 언니는 남편에 의한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다.어느 날언니의 집을 찾아갔을 때 형부가 언니를 폭행하는 장면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한 레일라는 형부를 죽였다. 그녀는 죄책감에 언니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 종신 복역 중 사면을 받고 출소한 레일라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야곱 신부에게 보내져 신부에게 오는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대필해 주..

읽고본느낌 2012.05.16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자연을 거스르면 몸이 운다 몸이 울면 마음도 아프다 아플 땐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기 거스르고 무리한 것들 내려놓고 비우기 힘들고 아플 땐 기본으로 돌아가기 새 힘이 차오르도록 그저 비워두고 기다리기 -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그래, 서둘지도 안달하지도 마.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뭘 기대할 필요도 없어.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때가 되면 다 무르익어가는 거야. 세상살이 잃고 얻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 아픈 상처도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낫게 될 거야. 거스르고 무리하지 않기, 비워두고 가만히 기다리기....

시읽는기쁨 2012.04.10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

시읽는기쁨 2011.03.04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은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시읽는기쁨 2009.09.15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누구나 다 비틀거리며 그곳으로 간다. 그러니 마음아, 상심하지 말아라. 먼 훗날 언젠가, 그리운 그곳에 앉게 될 때 알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걸어간 길이 빛나는 길이었음을, 외롭고 힘들었어도 영광의 길이었음을....

시읽는기쁨 2007.10.17

패자의 눈물

월드컵이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토고와의 첫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축구 열풍이 다시 온 나라를 태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승리를 기원하고 축하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어떨 때는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4 년 전 우리나라가 4 강까지 올라간 월드컵 때는 나는 우리나라 경기를 한 게임도 보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지만, 온 나라 사람들이미쳐버리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중계를 애써 외면했었다. 그 시간에는 다행히 서로 공감하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구석에서 술을 마시거나 야외에 나가 있었다. 그때는 삐딱한 그런 분위기를 즐겼다. 중계가 있던 어느 날의 저녁 시간이 기억난다. 지하철을 탔는데 승객은 서너 사람밖에..

길위의단상 2006.06.16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집을 떠나 무지개를 따라 나섰지. 어느 날 무지개는 사라지고, 나는 저녁 빈 들판에 홀로 남게 되었네. 사람들의 마을은 멀고, 빈 들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네. 그러나 먼 땅 위로 외로운 별 하나 떠오르고, 어두운 길에서는 낯 선친구를 만날지도 모르리. 무지개를 사랑한 걸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리....

시읽는기쁨 2006.01.13

외롭고 힘들 때

삶이 외롭고 힘들 때 찾아가 위로받을 수 있는 자기만의 장소가 있나요? 어제 오후에는 서해안의 외진 곳, 신두리 사구(沙丘)를 찾아갔다. 신두리 사구는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모래 언덕이라고 하는데, 약 1만년여에 걸쳐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해안가를 따라 사람 키 높이 정도의 모래 언덕이 바다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구 위에는 여러 종류의 키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는데 동식물이 관련된 생태적으로도 소중한 장소라고 한다. 저녁 무렵, 이 인적 드문 사구에서 바다를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어울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어떤 마음의 아픈 상처라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쓸쓸한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그리..

사진속일상 2004.04.30

내가 나를 위로하는 말

비 오는 날은 더욱 우울하고 답답하다. 체한것 같이 제대로 돌지 못하고 꽉 막혀있는듯한 마음 덩어리가 속에서 울컥거리고 있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증상을 알 것도 같다. 주먹으로 가슴을 쳐 본다. 그곳은 심장이 있는 자리다. 오늘은 혼자서라도 소주를 친구삼아야겠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자신에 대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이 자기 변명에 불과할 지라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그 무엇은 있는 법이다. 절망이란 그 의미를 잠시 잃은 자가 겪어야 할 고통이다. 생존의 문제든, 이상의 문제든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누구든 이런 좌절과 혼돈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계속 새로운 의미에 도전한다. 도전은 자의적일 수도..

참살이의꿈 200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