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11

말 없고 수줍은 아이

집에 손주가 찾아오면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벅적해진다. 뛰어다니고 재잘거리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댄다. 손주를 지켜볼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저 나이일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요사이 같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남기지만 그때는 카메라가 너무 귀한 물건이었다. 내 10살 이전의 사진은 딱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을 유추할 기록이 없으니 오로지 희미한 몇 개의 기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에피소드 하나. 여섯 살 무렵이었으리라. 할머니를 따라 오일장에 간 날이었다. 할머니는 머리에 이고 간 곡식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샀다. 빗자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값만 치르고 빗자루는 가게에 두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이상했지만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길위의단상 2024.01.10

소년

"어른인 척하는, 늙고 덩치만 큰 어린아이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소년을 품은 어른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소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년을 잘 간직한 채 성장하여, 어느 한 계절도 빈 곳 없이 속이 탄탄한 나무처럼, 섬세하고 집요한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년의 아름다움과 도도함을 고이 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정신분석가인 이승욱 선생이 쓴 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은 지은이가 자신의 소년 시절을 정신분석가답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해석을 한다. 지은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내 소년 시절이 겹쳐졌다.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최초의 기억인 원체험(原體驗)이다. 이 기억이 한 사람의 정서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기억으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

읽고본느낌 2022.10.20

책 읽는 소리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유별난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에 일흔이 되어서 첫 손자를 봤으니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오죽했겠는가.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버릇없이 자랐다 해도 할 말이 없다.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하면, 할아버지는 엉금엉금 기면서 내가 끄는 대로 따라다니셨다. 수염이 뽑혀도 그저 좋아라 하시며, 손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역이라도 마다치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이 희한한 구경거리가 났다고 모여들었다 한다. 사랑방에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자주 놀러 오셨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깨우쳤을 때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으로 나를 부르시고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또래보다 앞서 글자를 익힌 손자를 자랑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동갑내기보다 나는 먼저 학교에..

길위의단상 2020.07.30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

시읽는기쁨 2020.07.07

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곽효환

섬섬한 별들만이 지키는 밤 사랑채에서 마당 건너 뒷간까지는 수많은 귀신들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었다 깊은 밤 혹여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새까만 어둠 속에 득실거리는 더 새까만 귀신들 때문에 창호지를 바른 덧문을 차마 열고 나갈 수 없었다 대청 들보 위에는 성주신 부엌에는 조앙신 변소에는 측간신 그리고 담장 밖에는 외눈 부릅뜬 외발 달린 도깨비들.... 숨죽이며 가득 찬 오줌보를 움켜쥐고 참던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끝내 울음을 터뜨려 잠든 할아버지를 깨우곤 했다 문틀 위에는 문신이 파수를 서고, 지붕 위에서는 바래기기와귀신이 망을 보고, 어스름밤 골목에서는 달걀귀신이 아이들의 귀갓길을 쫓고, 뒷산 묘지에는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 더 먼 산에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우리가 사는 ..

시읽는기쁨 2019.01.12

외딴 유치원 / 반칠환

아랫목에 밥 묻어 놨다.... 어머니, 품 팔러 새벽 이슬 차며 나가시고 막내야, 집 잘 봐라 형, 누나 학교 가고 나면 어린 나 아버지와 집 지키네 산지기 외딴집 여름해 길고 놀아줄 친구조차 없었지만 나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네 외양간에 무섭지만 형아 같은 중송아지, 마루 밑에 양은냄빈 왈칵 물어도 내 손은 잘근 씹는 검줄이, 타작 끝난 콩섶으로 들락거리던 복실꼬리 줄다람쥐, 엄마처럼 엉덩이 푸짐한 암탉도 한 마리 있었다네 아아 낯설고 낯설어라, 세상은 한눈 팔 수 없는 곳.... 원생은 나 하나뿐인 외딴 유치원, 솔뫼 고개 우리 집 아니 아니, 나 말고도 봄에 한배 내린 병아리 떼가 있었네 그렇지만 다섯살배기 나보다 훨씬 재빠르고 약았다네 병아리 쫓아, 다람쥐 쫓아 텃밭 빠대다보면, 아버지 부르시네 ..

시읽는기쁨 2016.06.01

온몸으로 기뻐하기

7개월 된 둘째 손주가 있다. 태어나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배워가는 모습을 보면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게 된다. 아직 제힘으로 자리를 옮기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저를 돌봐주는 사람은 알아본다. 얼마 전까지도 날 보면 무섭다고 울었는데 지금은 낯이 익었다. 가끔 만나도 처음에는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좋아라 한다. 그런데 아기가 사람을 반기는 모습을 보면 놀라운 데가 있다. 얼굴로 환하게 웃는 건 물론이고 입을 벌리면서 두 팔을 허공에 뒤흔든다. 좋아하는 마음이 온몸으로 드러난다. 기쁨이 전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작은 존재가 즐거움에 온전히 젖어 있는 걸 느낀다. 반면에 어른은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환호하지를 못한다. 내숭을 떨기도 하고, 밀당의 줄다리기를 잘하는 비결을 배우기도 한다. 좋다는 감정에 ..

길위의단상 2015.06.09

한 장의 사진(18)

인생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시절은 유년이 아닐까 싶다. 유년은 가족의 축복 가운데 태어나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때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남은 몇 개의 기억이 따스했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 준다. 삭막한 인생살이에 지친 몸이 쉬어가는 오아시스가 바로 유년의 기억이다. 내 의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아마 서너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이었는데 시골 동네에는 잔치가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도 고모 등에 업혀서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골목길은 시끌벅적했다. 그런..

길위의단상 2014.03.10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유리도 귀했던 때 창호지 문에 조그맣게 유리 한 조각 발라 붙이고 인기척이 나면 그 유리 통해 밖을 내다보았지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 차라리 상상력이 더 길었던 때 여백이 많았던 때 문풍지 우는 바람이 아름다웠던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던 때 -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날씨가 차가워지니 고향 생각, 어릴 적 생각이 자주 난다. 추웠고, 먹을 것 부족했고, 모든 게 궁핍했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벽난로를 피우고 거실 한쪽 벽면을 유리창으로 환하게 만들어도, 그 옛날 창호지 유리 한 조각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호롱불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밤이었다. 추워서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누우면 싸락눈이 사각거리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면 온통 어둠..

시읽는기쁨 2013.11.20

몸에 밴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가 한때 어린이였다. 어린 시절은 지나갔으나 그때의 흔적은 지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내재과거아(內在過去兒, Inner child of the past)'란 개념이다. 내재과거아란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의 삶 안에 그대로 남아서 지속되고 있는, 우리가 과거에 겪어온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책을 쓴 미실다인(W. H. Missildine)은 정신과 의사로 어린이 정신 건강 센터의 책임자로 일하다가 성인의 정신적인 문제에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와의 온전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어른이 되어 외로움, 불안, 성적 장애, 우울증, 부부 사이의 불화,..

읽고본느낌 2012.05.09

유년의 목록

개울 건너 물레방앗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던 신작로 신작로 양편으로 도열하듯 늘어선 포플러나무 코스모스 만발한 길 보부상 아주머니 보따리 속의 예쁜 옷들 뒷마당의 땅강아지 처마 밑의 제비집 대보름날 뒷산에서의 쥐불놀이 비만 오면 잠기던 징검다리 할아버지의 흰 수염 소백산에서 몰아치던 겨울 칼바람 강에서 살던 그 많던 물고기들 보따리를 인 엄마 따라 장으로 가던 길 장터의 북적거림과 설렘 “워리”라고 부르면 방으로 뛰어 들어와 동생 똥을 먹던 똥개 수없이 날아다니던 메뚜기들 늦은 밤 동무들과 모여 놀다가 밖에 나서면 쏟아지던 별들 겨울이면 사랑방에 모여 새끼 꼬던 동네 청년들 일꾼들의 고봉밥 풍금소리 4-H 콩쿠르 노래자랑 대회 흰 연기를 날리며 달리던 증기기관차 겨울의 산토끼 사냥 콩서..

길위의단상 2009.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