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5

급훈 뒤집기 / 박완호

급훈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 숙여서 발을 보지 말라. 당연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별을 보라고, 별만 보라고 서로 얼마나 다그쳐왔던가? 되려 이제는 고개 숙여 발을 보라고, 제 발에 뭐가 묻었는지 어디를 무엇을 밟아가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든 제대로 가기 위해선 별을 올려보듯 발을 봐야 하리 고개 숙여 제 발을 보는 사람만이 마음속에 뜨는 별을 마주치게 되리 - 급훈 뒤집기 / 박완호 불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법연(法演) 선사가 세 제자와 함께 밤길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자 사위가 칠흑으로 변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법연은 제자의 수행력을 알아볼 셈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시읽는기쁨 2023.10.10

이상의 연애편지

얼마 전에 이상(李箱)의 연애편지가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1935년에 쓴 이 편지는 25살 된 이상이 소설가 최정희를 연모해서 보낸 글이다. 최정희는 백석으로부터도 사랑의 고백을 들었다고 하니 당대의 문학마당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천재시인이라 불리고 난해한 시로 유명한 이상이지만 연애편지는 뭇 연인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아쉬움이 애틋하게 적혀 있다. 청년 시절 이상의 한 단면을 엿보게 되어 흥미롭다. 뒷날 최정희는 시인 김동환과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는데, 그중 소설가 김지원과 김채원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

길위의단상 2014.08.01

장자[209]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떨쳐버리려고 달리는 자가 있었다. 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더욱 잦아질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느리다고 생각하여 더욱 빨리 달리며 쉬지 않았다. 드디어 힘이 빠져 결국 죽고 말았다. 그 사람은 그늘에 처하면 그림자도 쉬고 처함이 고요해지면 발자국도 그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리석음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 人有畏影惡迹 而去之走者 擧足愈數 而迹愈多 走愈疾 而影不離身 自以爲尙遲 疾走不休 絶力而死 不知處陰以休影 處靜以息迹 愚亦甚矣 - 漁父 2 이 비유를 읽으며 문득 이상의 '오감도'가 떠올랐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삶의나침반 2012.06.07

최후 / 이상

능금한알이추락하였다. 지구는부서질만큼상했다. 최후. 이미여하如何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 최후 / 이상 조영남 씨 덕분에 이상 시를 모두 읽어 보았다. 그 기념으로 이상의 시 한 편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상 시는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난해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렵게 시를 쓰는지 아무리 이쁘게 봐주려 해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천재와 범인의 차이란 말인가. 어찌 되었든 이것이 이상의 시 중에서 가장 짧다. 그리고 시어도 이상답지 않게 얌전하다. 그래도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능금한알이추락했다. 지구는부서질만큼상했다.'라는 구절은 멋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무슨 뜻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말이라도 이상이 하면 어려워진다. 아니..

시읽는기쁨 2010.07.26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조영남 씨를 가까이서 본 건 수 년 전 어느 종교 강연회장에서였다. 강연이 끝난 뒤 강사가 청중석에 있던 조영남 씨를 소개하며 소감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때 조영남 씨는 자신의 개신교 경력을 간단히 말한 뒤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피력했다. 당시 강연 주제도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영남 씨가 자신은 기독교를 이미 졸업했다는 요지의 발언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말이 당시에는 상당히 건방지게 들렸지만 지금은 자유주의자로서의 조영남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조영남 씨가 시인 이상의 시 해설서를 냈다. 제목이 이다. 아마 한자를 병기해야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상(李箱)은 이상(異常) 이상(以上)이었다. 조영남 씨는 책머리에서 왜 생뚱맞게 이상에 관한 책을 내는 이상한 일을 하..

읽고본느낌 2010.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