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8

어머니 / 이시영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 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 청소 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시읽는기쁨 2022.12.02

'나라' 없는 나라 / 이시영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 '나라' 없는 나라 / 이시영 선거법과 공수처법 처리를 두고 국회가 시끄럽다. 무한한 권력욕과 제 이익 챙기기밖에 모르는 정치꾼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언제 아니 그런 적 있었느냐고 나를 달래면서, 시인처럼 '나라' 없는 나라를 꿈꾼다. 쇠붙이와 껍데기의 ..

시읽는기쁨 2019.12.29

공기 / 이시영

공기를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편의점마다 공기가 동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 배출량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는 이제 툰드라나 아이슬란드 혹은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수입한 공기를 구입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부자 동네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다량이 공기를 매점해버렸기 때문에 서민들은 겨우 1리터의 공기 팩을 사기 위해 세븐일레븐과 GS25, 미니스톱을 향해 뛰었으나 품절되고 말았다. 병원 응급실마다 산소통이 반입되지 못해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며, 영유아들은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정부는 긴급대책으로 뉴질랜드로부터 대량의 공기선(船)이 들어온다고 발표했으나, 격분한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지금, 당장 마실 공기를 달라!"고 외쳤다. 경찰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진격..

시읽는기쁨 2015.11.17

귀가 / 이시영

누군가의 구둣발이 지렁이 한 마리를 밟고 지나갔다 그 발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들만의 단란한 식탁에서 환히 웃고 있으리라 지렁이 한 마리가 포도에서 으깨어진 머리를 들어 간신히 집 쪽을 바라보는 동안 - 귀가 / 이시영 내가 웃고 있을 때 다른 편에선 울고 있는 타자가 있다. 이것만 기억해도 사는 게 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어느 분은 아침에 밭일을 하다가 호미에 찍힌 지렁이를 보고 종일 밖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무던하게 사는 데는 무딘 감수성이 도움이 되겠지만 너무 뻔뻔해지는 건 경계할 일이다. 남을 해코지하고도 낄낄대는 족속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 슬프다.

시읽는기쁨 2015.01.17

봄 논 /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봄 논 / 이시영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듣기 좋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 보기 좋다고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논에 들어간 물이 벼를 키우고, 그 곡식이 생명을 기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땅의 차가운 물과 하늘의 뜨거운 불이 만나 나락을 만드는 것이다. 알갱이 하나하나는 곧 물과 불의 결합이다. 어렸을 때는 논두렁을 따라 잘 다녔다. 개울로 놀러 나갈 때는 논두렁을 지나야 했고, 학교에 오갈 때도 지름길이 논두렁이었다. 논두렁을 따라 걸을 때면 그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았다. 좁아서 조심해야 했지만 장난꾸러기들은 일부러 뛰어가는 스릴을 즐겼다. 논두렁에는 한두 개 쯤 물이 ..

시읽는기쁨 2013.05.07

히말라야 / 이시영

라다크에서 어느 할아버지는 다람쥐처럼 조르르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리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집앞 흔들의자에 앉아 소년처럼 잠시 붉은 얼굴로 타는 노을을 바라보다 그만 저 세상으로 가시었다 사람의 삶이 아직 광활한 자연의 일부였을 때 - 히말라야 / 이시영 히말라야 기슭에 사는 네팔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닮았다. 라마 호텔 롯지의 늙은 주인의 얼굴에서도 문명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인간적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물론 라마 호텔은 이름만 호텔이지 겨우 바람만 막는 허술한 숙소였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마저 궁핍한 것은 아니었다. 히말라야 쪽 네팔인들은 티베트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나이가 든 그들의 모습에서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디언의 풍모가 연상되었다. 사람의..

시읽는기쁨 2009.01.31

나의 나 / 이시영

여기에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 마 나는 저녁이면 돌아가 단란한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여름이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날아가 몇 날 며칠을 광포한 모래바람과 싸울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비 내리면 가야산 해인사 뒤쪽 납작바위에 붙어앉아 밤새 사랑을 나누다가 새벽녘 솔바람 소리 속으로 나 아닌 내가 되어 허청허청 돌아올 수도 있어 여기에 이렇듯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 마 - 나의 나 / 이시영 내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나'가 들어있다. 하늘을 닮은 나, 땅을 닮은 나, 늑대 같은 나, 양 같은 나, 어느 날은 군자가 되고, 어느 날은 소인이 된다. 가정과 직장의 안온한 울타리에 만족하지만 때로는 일탈을 꿈꾼다. 내 속에는 성인도 들어있고, 창부도 들어있다...

시읽는기쁨 2006.09.02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있을까 / 이시영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이 시영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과거는 아름답다? 하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나이 탓인가, 계절 탓인가 요즘은 옛날 생각이 자주 난다. 오늘 만난 이 시도 내 마음을 울린다. 나도 이십리 길을 걸어 읍내 중학교에 다녔다. 합승이라고 불렀던 작은 버스가 다녔지만 시골 아이들 대부분은..

시읽는기쁨 200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