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4

별빛 내시경 / 이원규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 도시를 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반딧불이 은하수 가물가물 첫사랑의 눈빛 두 눈이 멀기 전에 캄캄한 곳으로 가자 예감의 더듬이 더 바스라지기 전에 오지 마을로 별빛 사냥을 가자 네온사인 가로등 텔레비전 핸드폰 별 볼일 없는 세계 최악의 빛 공해 나라 밝아도 너무 밝아 생각은 먹통이고 사랑과 혁명도 시청률이 다 정해져 있더라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이 캄캄한 곳 진안 봉화 영양 인제 개마고원 백두산 북간도의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가보자 고흐의 별이 빛나는 아를 카페거리 생레미 생폴 정신병원도 너무 밝아졌더라 나는 왜 무엇으로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동해선 종단열차를 타고 고성 원산 청진 북두칠성 삼태성에게 물어나 보자 울다가 휙 노려보던 당신의 눈초리 별빛을 사냥하다 슬그머니..

시읽는기쁨 2022.12.18

노랑물봉선

전에 남한산성 아래 살았을 때는 여름이면 물봉선을 흔하게 보았다. 남한산성에 넓은 물봉선 군락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를 하고 난 뒤에는 물봉선 보는 것도 드물어졌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을 다시 찾았을 때 그때 군락지를 가보았지만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었다. 만났다 헤어지고, 있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은 꽃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뒷산을 산책하다가 새로운 물봉선 군락지를 만났다. 산 정상 부근의 습기 많은 지역이었다. 물봉선은 분홍색, 노란색, 흰색의 세 종류가있다. 물봉선, 노랑물봉선, 흰물봉선이라 부른다. 내가 본 바로는 눈에 띄는비율이 대략 7:2:1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노랑물봉선이 대세인 게 특이하다. 바로 옆에 골프장이 있는데 너희들은 인간의 화를 입지 말고 오래도록 잘..

꽃들의향기 2011.09.01

독거(獨居) / 이원규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 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 독거(獨居) / 이원규 나는 자본이 돌리..

시읽는기쁨 2006.04.25

[펌] 저 황금빛 들녘의 비애

경남 밀양의 가을 들녘을 걸으며 눈이 시리다 못해 충혈이 되도록 안부를 묻는다. 청명한 가을 햇살과 찬 서리를 맞아 속살부터 단맛이 차오르는 얼음골 사과의 표정으로, 그리고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사자평 억새꽃의 이름으로 그대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예사롭지 않은 세상, 그대는 정녕 이 가을에 행복하신가. 220일을 넘도록 걷고 걸으며 둘러보아도 세상은 온통 수상하고 수상할 뿐이다. 황금빛 출렁이는 저 들녘의 풍요는 어느새 풍요가 아니라 처절한 결핍이 되었다. 추수의 '감사'가 아니라 농산물 수입개방 문제 등으로 인해 생존권 사수의 '결사'가 되었다. 이따금 참새들이 날아와 벼이삭을 쪼더라도 화를 내는 척하지만 어느새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허수아비들의 여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의 ..

참살이의꿈 200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