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남한산성 아래 살았을 때는 여름이면 물봉선을 흔하게 보았다. 남한산성에 넓은 물봉선 군락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를 하고 난 뒤에는 물봉선 보는 것도 드물어졌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을 다시 찾았을 때 그때 군락지를 가보았지만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었다. 만났다 헤어지고, 있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은 꽃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뒷산을 산책하다가 새로운 물봉선 군락지를 만났다. 산 정상 부근의 습기 많은 지역이었다. 물봉선은 분홍색, 노란색, 흰색의 세 종류가있다. 물봉선, 노랑물봉선, 흰물봉선이라 부른다. 내가 본 바로는 눈에 띄는비율이 대략 7:2:1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노랑물봉선이 대세인 게 특이하다. 바로 옆에 골프장이 있는데 너희들은 인간의 화를 입지 말고 오래도록 잘 자라줬으면 좋겠다. 꽃말이 '날 건드리지 마세요'다.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 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 마음을 먹을까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 물봉선의 고백 / 이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