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11

동네 봄꽃 산책

어제 비 내린 뒤 대기가 깨끗해지면서 화창한 봄날이 열렸다. 그간 궂은 날씨가 이어지다가 오랜만에 환한 햇살이 반짝이는 날씨다. 아침 식사를 하고 동네 봄꽃 산책을 나선다. 동네 뒤편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복사꽃이 화사하다. 어느 집 정원에 핀 겹벚꽃이 눈길을 끈다. 마침 집 현관을 나오는 주인에게 양해를 얻고 들어가 나무 가까이에서 꽃을 감상하다. 눈부시게 고운 색깔이다. 정확한 이름은 왕겹벚꽃이라고 알려준다. 옆에 진홍색 꽃이 있어 물어보니 복숭아와 벚나무를 접 붙인 나무라고 한다. 사실인지 의아할 정도로 둘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꽃이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만첩홍도(꽃복숭아)인 것 같다. 이건 꽃사과겠지. 꽃잔디 색깔도 화려하고, 향기에 이끌려 가 보니 수수꽃다리가 ..

사진속일상 2023.04.19

어서 빛으로 일어나 / 이해인

주님 일어나십시오 돌무덤에 갇혀 있던 어둠을 밀어내고 어서 빛으로 일어나 우리에게 오십시오 죽음의 깊은 잠을 떨치고 일어나신 당신의 기침소리에 온 우주는 춤추기 시작하고 우리는 비로소 나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온 인류를 일으켜 세우신 그리스도여 죄를 뉘우쳐 눈이 맑아진 기쁨으로 오늘은 부활하신 당신의 흰 옷자락을 붙들고 산을 넘고 싶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도 끝내는 아름답게 피워 올린 자목련 빛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추어 둔 향기를 아낌없이 쏟아내는 4월의 꽃나무들처럼 기쁨을 쏟아내며 우리는 모두 부활하신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생명의 수액을 뿜어올리는 생명나무이고 싶습니다 어서 빛으로 일어나 우리에게 오십시오 - 어서 빛으로 일어나 / 이해인 그저께 ..

시읽는기쁨 2022.04.19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 정말 왜 그럴까 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세밑에 이르렀다. 아쉬움과 회한이 많이 남는 해다. 나이를 먹는다..

시읽는기쁨 2016.12.30

별을 보면 / 이해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 별을 보면 내 마음 뜨겁게 가난해지네 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그 넓은 꽃밭에 앉아 영혼의 호흡 소리 음악을 듣네 기도는 물 마실 수록 가득찬 기쁨 내일을 약속하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꿇어앉으면 안으로 넘치는 강이 바다가 되네 길은 멀고 아득하여 피리 소린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별 뜨고 구름 가면 세월도 가네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주는 마음 훗날 별만이 아닌 나의 이야기 꽃으로 피게 살아서 오늘을 더 높이 내 불던 피리 찾아야겠네 - 별을 보면 / 이해인 이 시는 수녀님이 21세 때 썼다고 한다. 첫 서원을 하기 전인 예비수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첫 연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이라는 구절이 오래 기억되는 시다. 며칠 전 TV에 ..

시읽는기쁨 2016.05.07

두 주일 만에 산책을 하다

발꿈치를 찌르던 통증이 마침내 가셨다. 두 주일 만에 뒷산길을 조심스레 산책했다. 영상으로 올라간따스한 날씨에 벌써 봄이 다가온 듯 했다. 한 달 이상 계속되었던 혹한을 지낸 터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밝다. "한 달 넘게 집안에 갇혀있다가 오늘 처음 나온거야." "이러다가 곧 반팔 옷을 입게 될 걸." 하긴 어제가 입춘이었으니 절기상으로는 이미 봄이 시작되었다. 봄, 가만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좋은 일들이 마구 생길 것 같다. 마음은 괜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꽃술이 떨리는 매화 향기 속에 어서 일어나세요, 봄 들새들이 아직은 조심스레 지저귀는 나의 정원에도 바람 속에 살짝 웃음을 키우는 나의 마음에도 어서 들어오세요, 봄 살아있는 모든..

사진속일상 2011.02.05

개불알풀

봄꽃하면 떠오르는 꽃들은어떤 게있을까?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겠지만 내 봄꽃 목록 중에는 개불알풀이 항상 앞쪽에 들어 있다. 이른 봄이면 길섶이나 밭둑 같은 데서 개불알풀이 먼저 피어나 봄소식을 알린다. 노루귀나 복수초는 산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지만 개불알풀은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만큼 가깝고 다정한 꽃이다. 하늘색 꽃잎의 큰개불알풀에 비해 개불알풀은 분홍색으로 작고 귀엽다. 그런데 자세히 바라보지 않으면 꽃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부끄러움을 타는지 자꾸 숨으려는 것 같다. 열매 모양에서 '개불알'이라는 이름이 연유되었다는데 요사이는 봄까치꽃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개불알이라는 이름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한자로는 지금(地錦)이라고 하는데, 말..

꽃들의향기 2010.04.02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말이 씨가 된다고 한다. 또, 말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곧 말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둘이 서로 악순환을 하며 돌고, 어떤 사람에게는 선순환을 하며 안사람이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마음의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있다. 내가 힘들었을 때, 옆의 친구는 애써 좋은 말과 좋은 생각을 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때는 귀에 잘 안 들어왔는데 지나고 보니 친구의 말이 옳았다. "행복해..

시읽는기쁨 2008.10.24

능소화의 계절

일주일 가까이 눈부시게 맑은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장마철이지만 습도가 낮아 공기도 건조하고 깨끗하다. 세상은 시끄러운데누구 말대로 날씨는 환장하게 좋다. 골목길을 지나다가 활짝 핀 능소화를 만났다.이 꽃을 보며 여름이 왔음을 새삼 다시 느낀다. 능소화는 여름에 어울리는 꽃이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주황빛 능소화는 뜨겁고 화려하다. 능소화에는 사람의 시선을 통째로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화려하면서 기품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애잔하고 육감적이다. 능소화(凌宵花)라는 이름부터가 도발적이다. 하늘을 업신여길 정도로 도도하다는 뜻일까. 덩굴을 내며 위로 올라가는 모습하며, 동백처럼 통째로 떨어지는 꽃송이가 이름값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능소화를 보며 느끼는 감상은 사람마다 ..

사진속일상 2008.06.26

백일홍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백일홍 꽃밭이 있다. 수녀님들이 제단 장식용으로 쓰기 위해 가꾼 꽃밭이다. 그런데 백일홍 꽃밭을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진다. 꽃이 깔끔하지 않고 자라는 키도 제각각이지만 멋 내지 않고 수더분한 인상이 마음씨 좋은 옆집 아줌마 같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백일홍은 다른 꽃에 비해 오랫동안 피어있다. 여름꽃이지만 가을이 짙어가는 지금까지도 볼 수 있다. 어떤 때는 “너, 아직도 피어있니?”하고 묻고 싶을 정도이다. 수녀원에서 백일홍을 심은 이유도 아마 이 탓이 아닌가 싶다. 오래 피어있다는 것이 꽃에게는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의 기준이겠지만 그것은 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수명이 짧은 꽃일수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꽃들의향기 2006.09.29

수국

수국(水菊)은 풍성하게 피어난 둥근 공 모양의 꽃이 탐스러우면서 복스럽다. 색깔은 보라, 분홍, 흰색 등 다양한데 그것은 수국이 자라는 흙의 산성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잿물을 뿌려주면 분홍색 꽃이 되고, 백반을 뿌려주면 청색 꽃이 된다니 신기하고 재미있다. 수국을 칠변화(七變花)라고도 부른다는데, 칠면조 마냥 색깔이 변하는 수국은 토양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나른한 여름 오후에 마당 한 켠에 피어 있는 수국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모나게 살지 말라고, 나처럼 둥글둥글 원만하게 살아가라고 속삭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해인 수녀님의 '수국을 보며'라는 시가 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잎새마다 물 ..

꽃들의향기 2006.08.11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작년에 대학로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친구의 소개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만아직 소녀같은 얼굴과 편안하게 느껴지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음 비우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원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읽는기쁨 200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