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7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

시읽는기쁨 2018.02.09

청동정원

80학번 최영미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고3 입시 전쟁부터 서울대 입학, 운동권 활동, 사랑, 결혼, 이혼의 아픔,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자유발랄한 영혼이 시대의 고뇌에 동참하고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하다. 책에 빠져 단번에 읽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 청춘이 떠오른다. 시대는 달라도 누구나 비슷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은 개인마다 달랐겠지만 시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젊음은 없었다. 그중에 일부는 운동에 뛰어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은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한 시대의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초 상황도 비슷했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가 시작되고 얼음왕국이 되었다. 학교에는 군대가 진주하고 문 닫는 날이 더..

읽고본느낌 2015.03.05

봄이 오는 뒷산

창밖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아침부터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어서 센 바람을 맞고 싶어 뒷산에 올랐다. 때가 되면 변해가는 계절은 속일 수 없음인가, 산 능선에서 바람 앞에 섰으나 이미 찬 기운은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명색이 북풍인데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한껏 잠바를 열어젖히고 가슴이 뻥 뚫리도록 바람을 맞았다. 겨울 동안은 전혀 출입을 하지 않았으니 석 달 만에 찾은 뒷산이었다. 봄이 가까워지면 숲에서는 새들이 먼저 분주해진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바쁘기만 한 박새가 제일 많이 눈에 띄었다. 찌찌 쯔르르르, 새소리가 없다면 숲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산기슭에는 괭이눈 초록 잎이 돋아났고, 버들강아지도 고운 물을 들이고 있었다. 이제 곧 총천연색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행복이..

사진속일상 2014.03.06

서울의 울란바토르 / 최영미

어떤 신도 모시지 않았다 어떤 인간도 섬기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새처럼 나 홀로 집을 짓고 허무는데 능숙한 나는 유목민. 농경 사회에서 사느라 고생 좀 했지 짝이 맞는 옷장을 사지 않고 반듯한 책상도 없이 에어컨도 김치냉장고도 없이 차도 없이 살았다 그냥. 여기는 대한민국. 그가 들어가는 시멘트 벽의 크기로, 그가 굴리는 바퀴의 이름으로 평가받는 나라. 정착해야, 소유하고 축적하고 머물러야, 사랑하고 인정받는데 누구 밑에 들어가지 않고 누구 위에 올라타지도 않고 혼자 사느라 고생 좀 했지 내가 네 집으로 들어갈까? 나의 누추한 천막으로 네가 올래? 나를 접으면, 아주 가벼울 거야 - 서울의 울란바토르 / 최영미 시인의 신작 시집 에 실린 시다. 최영미 시인하면 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약간은 당돌하..

시읽는기쁨 2013.06.02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 최영미 시인은 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선운사를 찾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가 4월쯤 되었을까, 뚝뚝 떨어진 선운사 동백꽃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가어느 날 떠나갔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섭리이듯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서운하고 아쉬운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대가 어찌 꽃이 지듯 쉽게 잊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 왜 그런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떠오른다. 소월의..

시읽는기쁨 2012.03.07

행복론 /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행복론 / 최영미 행복이란 무엇인가? 몇 개 공감이 가는 구절도 있지만 전체적으..

시읽는기쁨 2010.10.28

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에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사는 이유 / 최영미 다시 핸드폰의 알람을 ON 시킨다. 30여 년 동안이나 젖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틀 속으로들어간다. 낡고 진부한 삶의 겉옷을 걸친다. "행복한 줄 알아요. 아무도 불러주는 데가 ..

시읽는기쁨 201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