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3

폭설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

시읽는기쁨 2010.01.17

시래기 한 웅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를 한 웅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 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시읽는기쁨 2008.12.14

春來不似春

그저께 저녁부터 내린 눈이 폭설이 되어 중부 지방을 마비시켰다. 3월에 내린 눈으로서는 기상 관측이래 최대라고 한다. 고속도로에 갇힌 사람들에게 헬리콥터로 생필품을 공급하는 모습이꼭 전쟁터 같다. 오늘은 눈이 많이 녹았는데도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스산하다. 바람마저 차서 정말 春來不似春이다. 어찌된 일인지 비나 눈이나 바람이 왔다 하면 기록을 갈아치운다. 쇼킹한 뉴스도 흔해지면 시큰둥해져 버리듯 기상 이변도 이젠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그걸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어제 저녁에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이런 눈은 시집 와서 처음이라면서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처마까지 눈이 쌓여 겨우 길 내고 옆 집에 다닌다고 하셨다. 세상이 시끄러우니 날씨마저..

사진속일상 2004.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