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7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라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읽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시집 을 읽었다. 88편의 시가 실린 시집은 '님의 침묵'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끝판'으로 끝난다. 만해는 1925년에 백담사에 기거하며 이 시들을 썼다. 시집 전체..

시읽는기쁨 2024.02.07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야 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23.12.12

성북동 한 바퀴

신현회 다섯 명이 성북동을 한 바퀴 돌기 위해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났다. 성북동은 서울도성 밖에서는 문화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서울시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길상사, 수연산방 등 단편적으로 들러본 적은 있지만, 하루를 온전히 답사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먼저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언제 찾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심 속 사찰이다. 이번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연등에 매료되었다. 일행이 길상사를 돌아보는 동안 나는 연등 아래서만 놀았다. 성북동에는 고급 주택이 즐비하지만, 다른 한 켠에는 달동네도 있다. 둘이 공존하는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이다. 성북동성당도 잠시 기웃거렸다. 선잠단 옆에 선잠박물관에 들렀다. 선잠단은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

사진속일상 2019.05.02

해당화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바닷가에 피어 있는 붉은 해당화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꽃은 화려하지만 애처롭고, 모래땅에서 자라기에 강하게 보이면서도 여리게 느껴진다. 노래 가사에서 보듯 해당화에는 무언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의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서해에 갔을 때 비록 철이 지나 시들고 있었지만 해당화를 만나서 반가웠다. 해당화는 5, 6월이 꽃의 절정기라고 한다. 늦은 덕분에 이번에는 해당화 열매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열매가 크고 붉었다. 또한 줄기에는 가시가 많았는데 장미과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같이 내륙 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해당화는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의 꽃이다. 바다라야 고작 여름에 잠깐 찾..

꽃들의향기 2009.07.21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

시읽는기쁨 2007.10.07

인연설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있음에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치 말고 애처롭지만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람이라 지치지 말고 더 줄 수 없음에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으로 여겨 함께 기뻐하고 이룰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인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인연설 / 한용운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예기치 않는 새로운 인연들과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이고, 인연의 연속이다. 그리고 만남을 우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인연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고 따뜻하다. 인연이..

시읽는기쁨 2007.05.23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하늘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좋아..

시읽는기쁨 200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