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샌. 2005. 6. 20. 14:50

바람도 없는 하늘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좋아하는 시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시를 몇 편 고르라면 나는 이 시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를 나직히 외우다 보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 젊었을 때는 이 시를 읽으며 이성의 연인을 그리워하기도 했었다. 나이를 먹으며 두려워지는것은 자연에 대한 신비와 외경감을 잃는 것이다.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 뒤에 숨어있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리 영악할 지라도 자연에 대한경이감에 눈 멀어 있다면 그는 죽은 사람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내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 마음을 경탄케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머리 위에 있는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다. 그러나 내면에는 타오르는 등불이 있다. 이 등불은 전 우주를 비치며 쉼없이 타고 있다. 대자연의 신비와 미지의 존재 앞에서가슴 떨며 불 밝히고 있는 작은 영혼이 있다.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알 수 없는 그분에게 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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