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6

고니 없는 경안천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이런 경우이리라. 서울에서 옛 동료 두 분이 고니를 보러 내려왔는데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저께만 해도 볼 만했는데 하루 사이에 깜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어제 큰 소음이 나는 작업을 한 탓에 고니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설명이다. 두 분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니 없는 경안천 풍경이 쓸쓸했다. 대신 물에 잠긴 관목 뒤에서 노는 원앙 가족을 봤다. 경안천습지생태공원에서 원앙을 본 건 처음이었다. 손 형이 찍어준 사진 - 내 뒷모습은 그런대로 날씬하지 않은가. 초록색 조끼를 입은 여인들은 공원을 순찰하며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이다. 공원 안의 생태에 대해 물어보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전에 이분들 덕분에 공원에서 서식하는 황금개구리를 보기도 했다. 고니를 ..

사진속일상 2024.02.05

경떠회의 경안천 탐조

경안천의 고니를 보러 경떠회에서 광주에 찾아왔다. 오랜만에 회원 일곱 명이 다 모인 날이었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가, 고니는 다른 날에 비해 숫자가 적었다. 탐조는 오로지 운빨인 걸 어떡하겠는가. 다행히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고니 몇 마리가 있었다. 큰부리큰기러기는 가까이 다가가니 잔뜩 경계하더니 후두둑 날아갔다. 딱다구리는 열심히 나무줄기를 쪼고 있었다. 등이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쇠오색딱다구리로 보인다. 경안천습지생태공원 둑방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탐조와 겸해 인근의 신익희 생가와, 허난설헌 묘에도 들렀다. 두 어린 자녀의 무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해진다. 마무리는 팔당호에 인접한 카페에서 했다. 백로 한 마리가 얼어..

사진속일상 2023.02.11

코로나 추석

코로나로 이번 추석은 고향에서 모이지 않고 각자 지내기로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추석 차례를 주관하며 지낸 게 40년이 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누구도 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걸 보니 코로나가 대단하기는 하다. 할 일이 없어진 추석날은 길 걷기에 나섰다. 문득 난설헌이 생각났고, 그곳을 목표 지점으로 정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난설헌 묘가 있다. 전날은 감정 낭비가 심했는데 황폐해진 속도 달랠 겸 느릿느릿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걸어갔다. 난설헌과 두 자식의 묘를 내려다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난설헌의 가련한 생애가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자동차들의 굉음이 이어지던 중부고속도로는 얼마 되지 않아 상행선부터 정체가 시작됐다. 묘 옆에 있는 시비(詩碑)에는 난설헌 시..

사진속일상 2020.10.02

채련곡 / 허난설헌

秋淨長湖碧玉流 蓮花深處繫蘭舟 逢郎隔水投蓮子 或被人知半日羞 - 採蓮曲 / 許蘭雪軒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우거진 곳에 목란배를 매었네 물 건너 님을 만나 연밥 따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봤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 - 채련곡 / 허난설헌 허난설헌이 지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요염하다. 중국풍의 느낌도 난다. 여인의 연정과 수줍음이 연꽃을 소재로 잘 그려져 있다. 때는 가을, 연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연밥이 여무는 호수다. 호수에 배를 띄운 여인은 물 건너 사랑하는 낭군을 보고는 연꽃 열매를 따서 던진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조선 시대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나절이나 부끄러웠을까? 아마 몰래 배 위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더 어울릴..

시읽는기쁨 2017.07.01

허난설헌 묘

허난설헌 묘가 경기도 광주에 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난설헌을 떠올리면 늘 애잔하다. 시대와 맞지 못했던 인간의 슬픈 삶을 그는 보여준다.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라고 할까, 그때나 지금이나 수많은 난설헌이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다.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초희의 어린 시절은 열다섯에 시집을 가면서 180도로 변했다. 똑똑하고 자부심 강한 여성에게 가부장적 인습의 굴레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시집 입장에서는 반대로 까칠한 며느리와 아내가 탐탁치 않았을지 모른다. 20세기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난설헌이 16세기 조선의 답답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묘 앞 안내문에는 그녀의 일생이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시대 선조 때의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1563~..

사진속일상 2014.04.20

난설헌

너무 영민하고 너무 감성적이어서 시대와 불화했던 여인 허초희(許楚姬, 1563~1589), 스스로 지은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 그대로 그녀는 눈 속에 핀 한 송이 난초였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로운 가풍에서 성장한 그녀는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일찍이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로 삶이 삐걱댔다. 더구나 제 손으로 키워보지도 못한 어린 두 자식을 일찍 여의고 나서는 생의 의욕마저 상실했다. 문학에의 열정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고,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행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은 최문희 작가가 쓴 허난설헌의 일대기로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난..

읽고본느낌 2013.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