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 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래전 교회 다닐 때 외웠던 성경 구절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고 중얼거리게 되는 게 몇 있다. 그중의 하나가 로마서에 나오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다. 요사이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새번역 성경을 보지만 어떤 때는 개신교에서 쓰는 고어체의 옛 성경 문장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라사대' '~느니라' 등에는 향수 같은 게 배어 있다. 가톨릭 성경에는 이 문장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 되어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나에게는 어렵고 힘들때이 구절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른다. 그때에 나를 위로하는 말씀이다. 바울이 쓴 이 문장을 통해 믿는 사람의 하늘에 대한 절대 신뢰를 읽는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

참살이의꿈 2012.02.29

호치민 평전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베트남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영화관의 대한뉴스에서 국군이 베트콩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올 때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또, 아버지가 면에서 갖고 오시는 월남 소식을 알리는 책이 있었다. 반짝이는 지질에 선명한 칼러사진이 눈을 끌었던 화보였다. 그 책에는 국군의 활약상, 대민봉사하는 모습, 그리고 월남을 소개하는 사진이 많았다. 도대체 전쟁을 하는 나라답지 않게 월남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얀 아오자이에 모자를 쓴 월남 처녀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호지명(胡志明)이라 불린 호치민은 어린 나에게는 악당 월맹의 괴수였다. 몇 년 전에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친구에게서 호치민이 얼마나 베트남 국..

읽고본느낌 2012.02.28

건봉사 팽나무

고성에 있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한 고찰이다. 조선 시대 때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규모가 컸으며,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호국 도량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 남북 간 치열했던 공방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부터 복원이 시작되고 있다.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옆에 500년 된 팽나무가 있다. 끔찍했던 병화(兵火)를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전쟁 전 766칸에 달했다는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유일하게 불이문과 이 팽나무만 살아남았다. 수백 년을 살아가는 고목을 보면 뭔가 신령한 기운이 도와주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수없는 천재지변에 견뎌내지 못한다. 이 나무도 마찬가지다...

천년의나무 2012.02.27

화려한 공상

잠자리에 들어서 억지로 공상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웃 덕택이다. 한밤중의 소음을 견디기 위해서는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수밖에 없다. 책을 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게 더 낫다. 공상은 화려하고 자극적일수록 좋다. 요사이는 호화유람선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상상을 한다. 어떤 행운이 찾아와 가장 크고 화려한 선실이 공으로 주어졌다. 야외 수영장까지 딸려 있다. 거실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세계의 일품요리가 끼니마다 제공된다. 예쁜 아가씨의 룸서비스를 받으며 어느 왕에 부럽지 않은 여행을 한다. 유람선이 항구에 정박하면 특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모습을 그린다. 이런 상상은 마취제로 작용해 위층 소음을 잠시 잊는다...

길위의단상 2012.02.26

강동그린웨이를 걷다

물리회 스물네 번째 산행은 강동그린웨이를 걸었다. 아침 9시 30분, 고덕역에 네 명이 모였다. 날은 잔뜩 흐렸다. 고덕역 4번 출구에서 조금 나가면 명일근린공원에 닿는다. 여기서부터는 야트막한 야산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안내 표시판이 잘 되어 있어 길을 헷갈릴 염려는 없다. 이곳은 녹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서울과 하남의 경계선을 따라 길은 실처럼 이어진다. 천호대로를 지나면 일자산공원에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강동구 둔촌동 주공아파트를 오른쪽에 끼고 걷는다. 둔촌동(遁村洞)이란 지명은 이집(李集, 1327-1387)의 호인 둔촌(遁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집은 고려말의 학자였는데 공민왕 17년(1368)에 신돈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은거했다고 ..

사진속일상 2012.02.25

아침 / 호치민

감옥 벽 위로 해가 떠올라 감옥 문을 비추는구나 감옥 안은 아직 깜깜하지만 바깥에는 땅 위로 햇살이 퍼지네 일어나서 모두 경쟁하듯 이를 잡고 종이 여덟 번 치면 아침 식사 시간 형제여, 나온 것은 다 먹게나 이제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 아침 / 호치민 호치민[胡志明]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중이던 1942년에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길에 경찰에 체포된다. 호치민은 중국 감옥 안에 있는 동안 를 썼는데 그 안에 그가 지은 시가 전한다. 유교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호치민은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문주의자며 시인이기도 했다. 이 시를 보면 그가 낙관주의자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어떤 경우에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고 ..

시읽는기쁨 2012.02.24

장자[196]

오늘날 세속의 군자들은 몸을 위한다면서 생명을 버리고 외물을 좇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무릇 성인이 활동함에는 반드시 그 지향하는 목표와 행위의 수단을 살핀다. 여기 한 사람이 수나라의 구슬로 벼랑 위의 참새를 쏜다면 반드시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쓰는 비용은 무겁고 그 목적은 가볍기 때문이다. 더구나 생명은 어찌 수나라 구슬의 무거움 따위에 비교하겠는가? 今世俗之君子 多爲身 棄生以殉物 豈不悲哉 凡聖人之動作也 必察其所以之 與其所以爲 今且有人於此 以隨侯之珠 彈千인之雀 世必笑之 是何必 則其所用者重 其所要者重 夫生者 豈特隨侯之重哉 - 讓王 4 '수나라의 구슬'[隨侯之珠]은 수나라 임금이 뱀을 살려준 공으로 얻었다는 천하에서 가장 진기한 보물이다. 이 구슬을 참새를 잡..

삶의나침반 2012.02.24

드름산 소나무

춘천 드름산에는 멋진 소나무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전망대 옆에 서있는 이 소나무가 제일이다. 나무 모양으로 봐서는 반송인데 천인절벽 바위틈에서 너무나 곱게 자랐다. 마치 어느 집 정원수를 옮겨 심은 것 같다. 이 나무는 의암호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서 있다. 많은 나무가 척박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죽거나 상하거나 모양이 비틀어지는데 이 소나무는 다르다.자연 상태에서 이만큼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나무도 드물 것이다. 춘천 드름산의 제일송(第一松)이다.

천년의나무 2012.02.23

드름산길을 걷다

어제는 드름산에 올랐다. 이름이 특이한 드름산은 춘천 의암호에 이웃하며 삼악산과 마주 보고 있다.높이 357m로 야트막하지만 멋진 소나무와 동행하는 능선길이길고 예쁜 산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마치 깊은 산 속에있는 것처럼 크고 잘 뻗었다. 재미난 모양을 가진 나무도 많았다. 우리는 나무 구경하느라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나무 뿐만 아니라 발 아래로 펼쳐지는 전망도 좋았다. 의암호에 떠 있는 붕어섬이정말 호수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겼다. 산 정상에도 역시 눈길을 끄는 소나무가 있었다. 줄기는 외과수술을 받았지만 버팀대 없이도 튼튼히 잘 자라고 있다. 오늘 날씨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그러나 긴 능선길을 지나 계곡으로 내려가니 잔설이 남아 있고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다. 혹 복수초라도 있을까 좌우를 열심히 ..

사진속일상 2012.02.23

전주 완산칠봉

2월 19일(일), 이번에는 전주천을 따라 완산칠봉에 갔다. 덕진동에서 40분 정도 걸으면 산 아래 완산공원에 닿는다. 완산칠봉(完山七峰)은 전주시 남쪽에 있으며 전주를 대표하는 산이다. 서울로 치면 남산 쯤 될 것이다. 주봉인 장군봉(185m)을 비롯해 옥녀봉, 무학봉, 백운봉, 용두봉, 탄금봉, 매화봉의 일곱 봉우리가 나란히 산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이 완산을 점령하고 관군을 맞아 격렬한 전투를 벌인 현장이기도 하다. 1981년 처가에서 약혼식을 하고 양가 가족들이 이 완산칠봉으로 구경을 왔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서 전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즐거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로부터 30년이 넘게 흘러 그 자리에..

사진속일상 2012.02.21

경기전 참죽나무

전주에 있는경기전(慶基殿)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무는 북쪽 담 밖에 있는 참죽나무다. 수령이 350년이라고 나와 있는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참죽나무일 것이다. 중국이 원산인 참죽나무는 한자 이름이 '椿'인데 에 아주 오래 사는 나무로 나온다.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뒤마가 쓴'춘희(椿姬)'는 원이름대로 하면 '참죽나무 아가씨'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椿'으로 쓰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경기전 참죽나무는 큰 줄기가 부러진 상태로 나무가 여러 군데 잘려 있다. 생육 환경도 옹색하고 좋지 못하다. 담 밖에 있어서 그런지 왠지 소홀히 대접받는 느낌이다. 줄기 둘레는 4m, 나무 높이는 20m에 이른다.

천년의나무 2012.02.21

전주천을 따라 치명자산에 가다

2월 18일(토), 전주 덕진동에서 출발하여 전주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치명자산까지 갔다. 치명자산(致命者山, 360m)은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주장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동정부부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철(요한) 등 일곱 분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진 곳이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전주 남문 밖,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원래 이 산 이름은 승암산(僧岩山)이었으나 순교자의 묘가 들어오면서 치명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교자의 산'이란 뜻이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산상성당이 나온다. 성당 위..

사진속일상 2012.02.20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고, 1941년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유대계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제3수용소에서 노예보다 못한 나날을 보내다가 종전을 맞았다. 는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174517'로 지낸 10개월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작품을 여럿 읽었지만 는 그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이 책은 단순히 대학살의 현장을 증언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는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또한 강제수용소의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폭력으로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존엄성을 상실하는지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 존재의 ..

읽고본느낌 2012.02.16

화진포에 다녀오다

전 직장 동료들과 화진포를 중심으로 한 고성 지역을 둘러보고 왔다. 1박을 생각했는데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당일치기 나들이였다. 먼 곳이라 하루길이 어떨까 싶었는데도로 상태가 좋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길이 대부분 4차선 도로로 확장되어 있어 서울에서 동해 바다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지나는 길에 건봉사에 잠시 들리고화진포(花津浦)로 갔다. 김일성 별장에서 보는 호수와 바다가 절경이었다. 이곳에 김일성을 비롯해 이승만과 이기붕 별장이 있었던 이유을 알 것 같았다. 산과 호수와 바다, 그리고 나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풍경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 여유가 없어 느긋하게 머물며 음미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우리나라 최북단 마을이라는 명파리(明波里)를 둘러보고 거진항 제비호식당..

사진속일상 2012.02.15

노선을 이탈한 버스 / 김선호

블라디보스톡에서 312번 신설동행 버스를 만났다 서울에서 기다릴 땐 좀처럼 오지 않던 노선 버스가 쓸쓸한 바람이 무차별적으로 불어오는 광장에서 말을 걸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자 노선표도 안 뗀 현대자동차 마크가 선명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중곡동과 신설동을 오고가는 순하디순한 글씨 쇄빙선이 깨어 놓은 얼음길을 따라 먼 바다를 건너오느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다 날을 세운 바람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는 바람 사태에 바퀴는 단단히 부풀어 올랐다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불모의 땅으로 강제 이주당한 할아버지의 눈망울처럼 그렁그렁하다 생의 북쪽에 이처럼 따뜻한 기다림이 있냐고 신설동과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버스는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길이 시작되는 항구 블라디보스톡에서 ..

시읽는기쁨 2012.02.14

보경사 반송

포항에 있는 보경사(寶鏡寺)는 주변의 소나무가 아름답다. 솔숲에 둘러싸인 절집이 아늑하고 고풍스럽다. 절 안에 들어서면가운데에 있는 반송 한 그루가 우선 눈에 든다. 단아한 모습이 절집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그러나 줄기를 보면 보통의 반송과 달리 구불구불 용트림 모양을 하고 있다. 수령이 적어도 200년은 넘어 보인다. 원래 보경사에는 800년 된 회화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해인가 태풍으로 줄기가 부러지면서 죽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있었던 자리를 가리켜 준다. 보경사에는 오래된 탱자나무도 있지만 역시 태풍 피해를 당해 온전치 못하다. 지금으로서는 이 반송이 보경사를 대표하는 나무로 보인다.

천년의나무 2012.02.13

보경사 탱자나무

포항 보경사(寶鏡寺)의 탱자나무를 보러 갔다가 너무나 왜소한 모습에 당황했다. 수령이 400년 된 나무로는 어울리지 않는 크기였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 6m, 밑부분 둘레 97cm, 가슴 높이 둘레 60cm로서, 나무 모양은 원형이고 수세는 매우 왕성하다. 경기도 강화군 갑관리와 사기리에 각각 1그루씩(천연기념물 78, 79호)이 더 있으나 이 나무들에는 미치지 못한다.' 안내문에 적혀 있는 키나 나무 모양은 현재의 나무와는 딴판이다. 수세가 왕성한 게 아니라 무척 상해 있다. 원래 보경사에는 두 그루의 탱자나무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수년 전태풍으로 하나는 줄기가 부러져 죽었고, 남은 나무도 많이 다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초라해..

천년의나무 2012.02.12

겨울 동해안 여행(3)

영덕에서두 시간 넘게 달려 정동진에 닿았다. 옛날과 달리 길은 4차선으로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길을 갈 때는 해안을 따라 가는 2차선 도로였다. 빨리 편하게 이동하긴 하지만 옛길의 낭만은 사라졌다. 불편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단지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동진에서는 어디서나 보이는 산 위에 있는 큰 배(썬크루즈 리조트)를 찾아갔다. 평일이라서 일박에 7만 원으로 들 수 있었다. 위치가 높아서 전망이 환해 정동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다음 날, 9층 전망대에 나가서 일출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해가 살포시 얼굴을 보였다가 사라졌다. 다행히 날씨는 많이 풀어졌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빈둥거리다 나왔다. 불면증이 있는 아내는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이틀 연속 숙면을 취하..

사진속일상 2012.02.11

겨울 동해안 여행(2)

포항 내연산(內延山) 보경사(寶鏡寺)는 신라 진평왕 25년(602년)에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중국에서 불경과 보경을 가지고 와서 못에 묻고 지은 절이라 하여 보경사로 이름했다고 한다. 우선 절로 들어가는 길의 솔숲이 인상적이었다. 절 뒤 원진국사 부도 가는 길도 좋았다. 200m 정도 되는 짧은 길이지만 솔숲 사이로 난 길이 예뻤다. 뒤에서 바라보는 보경사의 품이 포근했다. 그중에서도 보경사에서부터 내연산으로 이어지는 내연산 계곡길이 제일 좋았다. 계곡을 따라 열두 폭포가 이어지는데 경치도 경치려니와 걷는 길이 아주 편안하면서 아기자기했다. 연산폭포까지 다녀오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첫번 째 만나는 상생폭포(相生瀑布)다. 옛 이름은쌍폭(雙瀑)이다. 양쪽으로 갈라져 사이 좋게 흘러내리는 모습이 충분히 연상..

사진속일상 2012.02.11

겨울 동해안 여행(1)

2월 8일, 포항 과메기와 영덕 대게를 현지에서 맛보기 위해 아내와 길을 떠났다. 중부, 영동,중앙내륙,경부,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지나는 긴 길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혹한의 추운 날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도 계속 영하의 기온이었고, 바람이 차갑고 세찼다. 이왕 포항까지 내려간 길에 동해안을 따라 강릉으로 올라오며 대관령에서 눈도 구경하기로 했다. 날씨만 좋다면 선자령 길도 걸어볼 예정이었다. 자연스레 2박 3일의 동해안 여행길이 되었다. 고속도로의 종점인 포항나들목을 통과해 시내를 지나 호미곶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동해와 다시 만났다. 겨울이어선지 바다 색깔은 더욱 짙푸르렀다.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호미곶으로 향하는 북부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길로 최고였다. 길은 꼬불거리며 마을과 들을 지나고 바다는 계..

사진속일상 2012.02.11

일본영화 두 편

괜찮은 일본영화 두 편을 보았다. 과 다. 개봉한 지 몇 해 지난 거라서 안방극장에서 본 게 아쉬웠다.그러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 잔잔한 영화는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얼마 전에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옆자리의 여자가 휴대폰으로 쉼 없이 문자를 주고받는 바람에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은 일본의 중학교가 무대다. 반 아이들에 의해 담임교사의 어린 딸이 살해된다. 이 영화는 담임교사의 우아한(?) 복수를 줄기로 하는 스릴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면서 인간 본성과 용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일본 학교의 교실 붕괴와 왕따 문제, 살인을 해도 처벌할 수 없는 미성년자보호법, 가정 문제, 아이들을 통해 표현..

읽고본느낌 2012.02.07

별은 다정하다 / 양애경

집에 돌아오며 언덕길에서 별을 본다 별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별은 그저 자기 할일을 하면서 반짝반짝하는 거겠지만 지구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내가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눈에 닿는 별빛이 몇만 년 전에 출발한 것이라든지 그 별이 이미 폭발하여 우주 속에 흩어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든지 보이저가 가보니까 토성의 위성은 열여덟 개가 아니라 사실은 스물한 개였다든지 그런 걸 알아도 그렇다 오히려 나도 다음 生에는 작은 메탄 알갱이로 푸른 해왕성과 얼켜 천천히 돌면서 영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좋겠다 싶다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작은 사람 같아서 가족의 식탁에 깨끗이 씻은 식기를 늘어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냄비를 가운데 내려놓는 여자 같아서 별은 다정하다 - 별은 다정..

시읽는기쁨 2012.02.06

입춘대길

글씨 쓰는 친구에게서 입춘방(立春榜)을 받았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아신백복(아新百福)이다. '아'는 '맞을 아'자라는데 처음 보는 글자다. 글자판의 한자 목록에도 안 나와 있다. 일반 주택이라면 대문에 붙이면 되겠지만, 아파트에서는어디에 붙이는 게 좋을까? 주거 형태가 아파트로 변하면서 입춘방 풍습도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것 같다. 입춘방을 보며 한 해의 첫 절기를 맞아 집안의 화목과 복을 비는 선조의 소박한 마음을 느껴본다.

사진속일상 2012.02.05

잊혀진 질문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직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보냈던 종교적 질문이 공개되었다. 1987년, 죽음을 앞두고 신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24개의 질문으로 물었다. 당시 정의채 신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직접 만날 예정이었으나,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묻혀 있던 질문이 차동엽 신부를 통해 이번에 알려졌다. 이 질문을 접하면서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이기 이전에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만큼 정리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다음이 이 회장의 24가지 질문이다.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

참살이의꿈 2012.02.04

장자[195]

월나라 사람들은 삼대에 걸쳐 그들의 군주를 죽였다. 왕자 수는 그것을 근심하다가 도피하여 단혈에 숨어버리니 월나라는 군주가 없게 되었다. 왕자를 찾았지만 알지 못하다가 단혈까지 가게 되었으나 왕자는 굴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풀을 베고 연기를 피워 그를 왕의 수레에 오르게 할 수 있었다. 왕자 수는 군주가 되기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환난을 싫어한 것이다. 왕자 수는 나라를 위해 생명을 손상시키지 않을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월나라 사람들은 그를 군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越人三世弑其君 王子搜患之 逃乎丹穴 而越國無君 求王子搜不得 從之丹穴 王子搜不肯出 越人薰之以艾 乘以王輿 王子搜非惡爲君也 惡爲君之患也 若王子搜者 可謂不以國傷生矣 此固越人之所欲得爲君也 - 讓王 3 춘추시대 때 개자추(..

삶의나침반 2012.02.03

제일 추웠던 날

오늘 아침은 영하 20도로 떨어졌다. 올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이었다. 이날 고등법원 항소심 법정에 불려 나갔다. 마음마저 오슬오슬 떨렸다. 바로 옆에는 가정법원이 있었다. 가정법원은 대부분이 이혼소송이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그쪽 법정 구경도 했다. 특이하게 거의 모두가 다문화가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법원에 들락거리는 사람, 어느 하나 사연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게 뭔지, 사건 당사자가 되어서 법정에 출두해 느껴보는 심정은 착잡하고 묘했다. 벌써 3년째다. 글쎄, 지금에 이르러 내가 느낀 건 연민이다.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판사도, 억울해하는 항소인도, 그리고 나 자신도 불쌍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변론하고, 누가 누구를 판단한단 말인가. 거기서 거대하고 막막한 시스템의 벽을 느낀다. 그..

사진속일상 2012.02.0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아내는 불면증을앓고 있다. 4년 전 뇌수술을 받은 뒤 더 심해졌고, 작년에 딸을 시집보낸 전후로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그때는 수면제도 약발이 듣지 않았다. 밤을 꼬박 새우는 날이 흔했다. 본인의 고통이야 말할 필요가 없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심정도 무척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다행히 해가 바뀌면서 요사이는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이젠 가끔 수면제를 이용할 뿐 전에 비하면 수월하게 잠이 드는 편이다. 그래도 두세 시까지는 침대와 거실을 왔다갔다한다. 잠드는 게 전쟁이다. 반면에 나는 잠이 너무 많다. 하루에 아홉 시간 넘게 잠을 잔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아침 여덟 시가 넘어야 눈을 뜬다. 아내가 자야 할 잠을 내가 다 뺏어온 것 같다. 어제는 저녁 운동을 다녀온..

길위의단상 2012.02.02

짚 한오라기의 혁명

을 쓴 후쿠오카 마사노바(福岡正信)는 농부라기보다 사상가요 철학자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자신의 깨달음인 일체무용론(一切無用論)을 농업에 적용하여 자연농법(自然農法)을 창안했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40년 동안 연구한 결과다. 자연농법은 땅을 갈지 않고, 비료를 쓰지 않고, 농약을 쓰지 않고, 제초를 하지 않는다. 지금의 과학농법이나 심지어는 유기농법과도 질적으로 다른 혁명적인 농사법이다. 선생은 일체의 인위를 쓸모없는 것이라 본다. 인위를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는 현대의 가치관이 문제의 근원이다. 과학 지식을 비롯한 모든 인간 행위는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왜소화시켰다. 자연농법은 그런 인간의 지혜를 부정하는 무위의 농법이다. 농부는 놀고, 농사는 자연이 짓는다. 자연농법으로 쌀과 ..

읽고본느낌 201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