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61

귀트임과 귀닫음

인터넷으로 층간소음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귀트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알게 되었다. 얼핏 들으면 '귀가 트였다'라고 해서 깨달음을 얻은 듯한 좋은 뜻으로 생각되지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귀트임은 층간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생기는 질병이다. 청각과민증의 하나로 특정한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현상이다. '선택적 소음 과민증후군'이라 할 수 있는데, 영어로는 '미소포니아(misophonia)'라고 부른다. 설명을 읽어 보니 현재 내 상태와 너무나 비슷하다. 우선 귀트임은 소리의 물리적 특성과는 무관하다. 작고 부드러운 소리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되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귀트임은 소리가 나는 상황이나 의미, 소리를 내는 주체, 환경 등과 관계가 있다. 내 집에서 들리는 소리에 ..

길위의단상 2024.10.18

축!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그저께 저녁(2024/10/10) 컴퓨터 화면에 속보가 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 작가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보도였다. 이게 무슨 일?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가 금방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아,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구나! 이번 수상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한때는 노벨 문학상 발표일이 되면 유력한 수상자로 기대되던 시인의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나도 시간에 맞추어 소식을 기다렸다. 여러 해 동안 공염불이 되자 열기가 시들해졌고 이젠 아예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차에 마른하늘의 벼락처럼 낭보가 터진 것이다. 한림원에서는 수상 이유로 한강 작가의 글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력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폭력성과..

길위의단상 2024.10.12

해리스 vs 트럼프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인 해리스(Kamala Harris)와 트럼프(Donald Trump)의 미국 대통령 선거 TV 토론이 어제 있었다. 우리 시간으로 아침 10시에 시작했는데 생중계를 보느라 처음부터 끝까지 TV 앞을 지키고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남의 나라 정치 쇼에 내가 왜 이렇게 관심이 큰지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해리스라는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컸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트럼프는 워낙 비호감이라 해리스를 응원하며 토론을 지켜봤다. 노회한 트럼프를 여유 있게 상대하면서 토론을 주도해 나가는 해리스가 멋있었다. 부드러우면서 강인해 보이는 이미지도 좋았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선거에서 해리스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미국의 국내 정책에 대한 논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

길위의단상 2024.09.12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대학생 때 파동 수업을 들을 때로 기억한다. 교수님이 이렇게 물었다."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다면 소리가 났을까? 안 났을까?"우리는 왈가왈부하면서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곧 이 질문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관점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8부작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봤다. 제목만으로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위의 질문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동시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50여 년 전에 강의실에서 받은 질문을 똑 같이 드라마에서 만날 줄이야. 드라마는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우연히 마주한 사건으로 인해 모텔 주인의 삶은 풍비박산이 나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대처 방식을 다루는 드라마다. 누군..

길위의단상 2024.09.06

뜨거운 여름

올여름은 무척 덥다. 어제는 우리 지방 낮 최고기온이 35℃까지 올랐고, 서울은 36℃를 넘었다. 이번 더위는 습도가 높아서 사우나실에 있는 것 같은 찜통더위다. 기상청 자료를 보니 8월 들어 평균습도가 79%로 예년보다 훨씬 높았다. 올초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덥긴 했지만 가만히 있거나 그늘에 들어가면 땀이 잦아들고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 더위는 그늘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달아오른 시멘트 도시의 열기는 피할 수 있다. 낮에는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켜지만 저녁이 되면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한밤중에는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다. 낮의 열기가 그만큼 쉬이 사그라진다. 어제 만난 서울 사는 지인은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고 불평을 했다. 바..

길위의단상 2024.08.14

안경 다섯 개

내가 사용하는 안경 종류는 다섯 개나 된다. 그동안은 보통 안경에 선글라스, 돋보기 둘(독서용과 컴퓨터용)로 네 종류였는데 지지난달부터 고글이 추가됐다. 한참 전부터 눈물이 흐르고 충혈되는 눈 질환이 자주 찾아왔다. 안과에서는 눈물관이 막힌 탓이라고 했다. 바람을 맞으면 증세가 심해지는데 의사는 고글 쓰기를 권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안경이 생겼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섯 개 중 하나를 사용한다. 요사이는 외출할 때 주로 고글을 쓴다. 답답하기는 하나 바람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다. 그래선지 최근에는 눈물이 과다하게 흐르는 현상이 생기지 않는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효과가 확실하다면 약간의 불편은 감내할 만하다. 20대 중반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50대까지는 안경 하나로 넉넉했다. 그러다가 ..

길위의단상 2024.08.05

이재명의 먹사니즘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다." 지난 10일에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재명 후보가 한 말이다. 먹사니즘/먹고사니즘은 '먹고살다'와 '-ism'의 합성어로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태도다. 또는 생계유지에 급급해 다른 것들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를 꺼리는 태도를 의미하기도 해서 부정적인 의미가 큰 용어다. 차기 대통령이 유력시 되는 이재명 후보의 발언은 국민의 주목을 받는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강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설마 이 후보의 본심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갖는다. 첫째, 먹사니즘이 과연 이 시대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후보는 ..

길위의단상 2024.07.14

다이슨 스피어

뉴스에 우주 관련 기사가 나면 유심히 본다. 특히 외계 생명체나 문명에 대한 관심이 크다. 얼마 전에 '다이슨 스피어'가 설치됐을 가능성이 있는 별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다이슨 스피어(Dyson Sphere)는 항성의 복사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 항성을 둘러싸는 구형의 초대형 구조물을 말한다. 이런 구조물이 가능하다면 에너지 문제는 일거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에너지 수요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우주 문명 2단계에 들어서면 행성의 부존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하고 항성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현재 지구가 태양으로 받는 에너지는 전체 태양 복사에너지의 22억 분의 1에 불과하다. 문명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다이슨 스피어로 태양 복사에너지를 활용할 구상을 하지 않을 수 ..

길위의단상 2024.07.06

한 장의 사진(35)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철없었던 유소년 시절을 제외하고 전체를  조망해 볼 때 의심 없이 딱 짚히는 한 시기가 있다. 바로 1990년대 초반으로 내 나이 40대에 들어선 때였다. 그때는 가정이나 직장, 개인적인 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제일 빛나는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내 집을 장만하는 게 일차 목표가 되는데 마침 그때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나도 그럴듯한 '마이 하우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한강 이남의 인기 지역이었다. 그전까지 10평대에 살다가 30평대로 옮기니 마치 대궐 같았다. 아이 둘은 초등학생이었으니 귀엽기만 할 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힘든 결혼 초기를 보낸 아내도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당시 60대였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

길위의단상 2024.06.21

삼한사온

전에 직장 동료였던 H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년 가량 연락이 끊어진 채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걱정되기도 했다. 누구든지 통화를 하게 되면 맨 처음 묻는 말이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H는 대뜸 말했다."삼한사온으로 살고 있지요."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H의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시원찮았다가 괜찮았다를 반복하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온갖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주기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삶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10여년 전부터 겪었던 증상과 비슷했다. 불현듯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이삼 주 정도 지속되면서 괴롭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니 일상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러다가 슬며..

길위의단상 2024.06.08

the BUCK STOPS here!

지난 9일에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취임한 지 2년이 되는데 고작 두 번째였다. 이것만 봐도 처음에 장담했던 국민과의 소통은 무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이제 불통의 이미지로 굳어 버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보다가 '역시나'라는 실망에 TV를 끄고 말았다. 대통령의 발언 내용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기자회견 전 모두 발언을 할 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팻말이었다. 거기에는 'the BUCK STOPS here!'라는 생소한 영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뜻이 무엇인지, 왜 저런 영어 문장을 내세웠는지 궁금했다. 'buck'을 사전에서 찾아봐도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얼핏 든 느낌은 '내 앞에서 헛소리하지 말라!'로 대통령이 국민에게 공갈치는 게 아닌가 ..

길위의단상 2024.05.17

오로라 잔치

지난 5월 8일부터 강력한 태양 폭발이 연이어 발생했다. 현재 태양 표면에는 지구 크기의 16배에 이르는 흑점이 생겨 있고 맨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이곳에서는 10시간 정도의 주기로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입자들을 우주로 쏟아내고 있다. 이 여파로 11일부터 지구가 자기 폭풍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태양에서 날아온 플라스마 입자들이 지구 자기장에 교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번 지자기 폭풍은 가장 강력한 G5 등급에 해당하며 21년 만의 최강 태양 폭풍이다. 태양 폭풍은 전 세계의 통신이나 전력망에 장애를 일으키지만 저위도 지역에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입자들이 지구 자기장에 이끌려 대기권에 들어오면서 공기 분자/원자들과 충돌할 때 생기는 빛이다. 어..

길위의단상 2024.05.14

당구 명언

PBA가 생기면서 우리나라는 당구의 중심국이 되었다. 그러나 당구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관계로 용어는 대부분이 일본어다. 가라꾸, 나미, 다마, 다이, 레지, 무당, 빠킹, 삑사리, 오시, 짱꼴라, 쫑, 황오시, 후루꾸, 히까기, 히끼, 히네루, 히로 등 많다. 이중에 다수는 지금도 당구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빨리 바로잡아야 할 텐데 습관의 힘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용어만이 아니라 당구 이론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보인다. 물리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는데 엉터리로 적용하는 게 많다. '힘'이나 '충격량', '운동량'에 대한 기본 개념이 결핍되어 있으면서 공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니 억지가 심하다. 그렇다고 당구가 이론으로 되지도 않는다. 이론에 정통한 사람이 당구를 잘 친다면 물리학자나..

길위의단상 2024.04.28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일본은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버타운협회에서 주관하는 센류 공모전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센류(川柳)'란 5-7-5 음률의 정형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다. 하이쿠와 비슷한데 자연을 소재로 하는 하이쿠와 달리 센류는 인간 삶의 애환에 중점을 둔다. 이 공모전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매해 1만 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된다고 한다. 고령자의 생활상과 심정을 읊은 '실버 센류' 작품을 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프고 애잔하다.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상작은 책으로도 출판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다. 그중 몇 수를 골라보았다. 확인한다 옛날에는 애정 지금은 숨소리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길위의단상 2024.04.08

호승심

2023-2024 당구 시즌을 마감하는 월드 챔피언십 결승이 어제 끝났다. 남녀부 우승자는 조재호와 김가영 선수였다. 당구를 잘 치지는 못하지만 선수들 경기를 구경하는 것은 좋아한다.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승부를 벌이는 선수들의 긴장된 모습과 호흡에서 짜릿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잘 쓰이지는 않지만 호승심(好勝心)이라는 말이 있다. 승부욕과 비슷한 말로 '반드시 이기려는 마음'을 뜻한다. 승부사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인드다. 아마추어라면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지만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호승심이 없다면 프로의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신을 응원하는 팬에 대한 프로의 사명이기도 하다. 승부를 가려야 할 때 이기려는 마음은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이다. 친..

길위의단상 2024.03.18

0.72

작년(2023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이 0.72명으로 발표되었다. 역대 최저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값이다. OECD 38개 회원국 중 출산율이 1명을 밑도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것도 1보다 한참 밑이다. 작년에 출생한 신생아 수는 23만 명이었다. 2013년에 43만 명이였으니 10년 만에 절반 가까이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인구는 2020년부터 자연감소하기 시작했다. 산술적으로 보면 출산율이 2명은 되어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이런 출산율이라면 앞으로 인구 감소 경향은 가속화할 것이다. 출생율을 높이기 위해 온갖 정책을 내놓지만 백약이 무효인 것 같다. 그만큼 이 땅에서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이다. 자식을 낳아 기를 엄두가 나지 않고, 살아..

길위의단상 2024.03.07

북극곰의 불안한 휴식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작은 해빙(海氷) 위에서 북극곰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린 채 쪽잠을 자고 있다.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주관하는 사진전에서 '올해의 야생 사진상'을 받은 작품으로 제목은 '얼음 침대(Ice Bed)'다. 영국의 아마추어 사진가인 니마 사리카니가 찍었다. 사리카니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에서 3일간의 기다림 끝에 얼음덩이를 팔로 긁어내 기댈 곳을 마련한 뒤 잠이 든 북극곰을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극의 얼음이 사라지면서 북극곰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바다 얼음 위에서 생활하며 바다표범 같은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북극곰에게 해빙이 줄어든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과..

길위의단상 2024.02.28

앓던 이가 빠지다

열 달 전부터 앞니 하나가 시큼거렸다. 신경이 쓰였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정도여서 치과에 가지 않고 버티며 지냈다.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도 저절로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한때는 잊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기도 했다. 이번 설날에 조상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음복을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말썽을 부리던 앞니가 끝을 맞은 것이다. 손가락으로 당기니 쑥 하고 빠져나왔다. 저절로 수명을 다하며 자연사한 셈이었다. 이 정도 되기까지 참고 견뎠으니 어지간히 미련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진즉에 병원에 갔다면 빠른 조치가 가능하고 고생도 덜 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워낙 게으르고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병원에 간들 뽑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테니 약..

길위의단상 2024.02.13

앙코르와트의 옛 모습

앙코르 와트를 만든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조는 802년에 시작되어 1431년에 아유타야 왕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그리고 앙코르 와트는 밀림 속에 묻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 왕족의 후손인 앙찬 1세가 코끼리 사냥을 나갔다가 다시 발견했다고 한다. 불과 백 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선조가 세운 이 거대한 구조물을 보고 몰라서 놀라워했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다. 그때부터 소문이 나면서 여러 사람들이 찾지 않았을까 싶다. 1586년에 스페인 탐험가였던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이곳을 찾았다. 앙코르 와트가 유명해진 것은 1860년에 프랑스의 식물학자 겸 탐험가인 앙리 무오가 이곳을 방문하고 탐험록을 출판한 결과였다. 앙리 무오는 이렇게 썼다. "이 사원은..

길위의단상 2024.01.28

말 없고 수줍은 아이

집에 손주가 찾아오면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벅적해진다. 뛰어다니고 재잘거리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댄다. 손주를 지켜볼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저 나이일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요사이 같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남기지만 그때는 카메라가 너무 귀한 물건이었다. 내 10살 이전의 사진은 딱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을 유추할 기록이 없으니 오로지 희미한 몇 개의 기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에피소드 하나. 여섯 살 무렵이었으리라. 할머니를 따라 오일장에 간 날이었다. 할머니는 머리에 이고 간 곡식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샀다. 빗자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값만 치르고 빗자루는 가게에 두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이상했지만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길위의단상 2024.01.10

블로그 20년

2003년 9월 12일에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20년이 된다. 막상 해당 날짜에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20년이나 된 걸 알았다. 그때 알았다면 뭔가 기념이라도 했을 텐데. 20년 전 무렵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시기였다. 밤골 생활이 벽에 부딪치면서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차가운 질책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것이 블로그였다. 나를 진실로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타인와 소통하기 위해서 개설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한테 하는 대화며 독백이었다. 블로그를 하면서 뭔가를 쓴다는 것이 엄청난 위안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 블로그가 아니었으면 우울증에 걸렸거나 자포자기했을지 모른다. 좀 ..

길위의단상 2023.12.31

이웃을 잘 만나는 복

예부터 바람직한 인생을 위해서는 오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오복(五福)이란 건강한 치아, 부부의 백년해로, 많은 자손, 풍족한 재산, 명당에 묻히는 것 등이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빼도 괜찮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치아는 치과에 가면 새것처럼 만들어 준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당에 묻혀야 한다고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현대인은 없다(대통령병에 걸린 몇몇을 제외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이웃을 잘 만나는 복'을 오복에 포함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거주 비율이 80%가 넘는다. 많은 사람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과 살아간다. 너무 밀집하여 살면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게 층간소음이다. 막무가내인 이웃을 만나면 해결책이 없다. 현대에서 ..

길위의단상 2023.12.28

견리망의(見利忘義)

'교수신문'에서는 연말이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올해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의로움을 잊고 이익만 챙긴다'는 뜻으로, 전국 교수 1,300여 명이 뽑았다.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로 유명한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뒤집어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를 들라면 극심한 이기주의가 아닐까 한다. 옛날이라고 인간성이 달랐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의로움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제는 다들 철면피가 되고 뻔뻔해졌다. 도시와 시골, 잘 사는 이나 못 사는 이나 차이가 없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고,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되었다. 견리망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정치판이다.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의로움 따위는 헌신짝만..

길위의단상 2023.12.17

전보가 사라진다

전보가 도입된 지 138년 만에 곧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보도를 봤다. 옛 시대의 상징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전보는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신 시설이 개통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선을 보였다. 사실 '전보(電報)'라는 말은 오랜만에 들었다.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박스를 만나는 야릇한 느낌이랄까, "아직 전보가 있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돌아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보를 자주 이용했다.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니 연락 수단은 편지나 전보였다. 급한 연락을 하자면 전보밖에 없었다. 우체국에 가서 보낼 말을 적어주면 당일로 전달이 되었다. 글자 수에 따라 요금이 정해지니 문장은 가능한 한 짧게 압축해야 했다. 고등학생 때는 고향집에서 보낸 "어머니상경 5시청량리역" 같은 전보를 자..

길위의단상 2023.12.04

영정사진과 장수사진

4년 동안 여권 없이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신청했다. 겨울에 손주와 앙코르와트에 갈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아내도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같이 사진관에 들렀다. 처음에는 집에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으로 신청해 봤으나 두 번이나 반려를 당했다. 내 실력으로는 여권 사진 기준에 맞추기가 어려워서 헛심만 쓰다가 포기했다. 사진을 찍은 뒤 젊은 사장이 컴퓨터 앞에서 클릭 몇 번을 하니 금방 깔끔한 사진이 나왔다. 옛날에는 필름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친 뒤 사진을 찾자면 며칠이 걸렸다. 사진을 다루는 데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디지털 처리를 하는 지금은 모든 것을 프로그램이 처리해 준다. 5분 만에 보정까지 마친 따끈따끈한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좋은(?) 세상이 되었다. 사진에 만족한 아내는 뜬금없이..

길위의단상 2023.11.25

H 선배를 추모함

"가장 선한 상인보다는 가장 악한 공무원이 더 선하고, 가장 선한 공무원보다는 가장 악한 교사가 더 선하다." 사범대학에 입학해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이다. 당시에 너무 의아하게 들린 발언이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사실이지도 않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여러 동료 교사들을 만났다. 교사 집단이라고 해서 더 선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교사들이 다른 직업의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람도 있다. 내가 만난 동료 교사들을 돌아볼 때 서너 명의 존..

길위의단상 2023.11.15

정치인의 얼굴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이웃에 살아 가끔 길에서 만나는데, 서로 목례를 하며 짧은 인사말 정도는 나눈다. 이분이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지인의 친구여서 짧은 상견례를 가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여서 거리감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때는 인상이 후덕하고 푸근해서 누구에게서나 호감이 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선이 된 데는 그런 이미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무난한 의정 활동에 재선을 했으니 어느덧 8년이 흘렀다. 그런데 요사이 얼굴은 많이 지치고 찌들어 보였다. 얼마 전에는 뒷산에서 마주쳤는데 표정이 영 말이 아니었다. 미소는 짓지만 얼굴에 배인 어두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8년 전과 비교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나 싶었다. 이분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정치인이 그..

길위의단상 2023.11.09

닷새만에 회복하다

지난주에 무리를 했던 것 같다. 세 번의 모임이 있었고, 연이어 고향에 내려가 산소 일을 했다. 그 뒤부터 목이 따끔거리며 몸살기가 나타났다. 두통이 동반되고 콧물도 나왔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에어컨이 문제였다. 특히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냉기가 심했다. 늘 갖고 다니던 팔 토시가 그때는 없어서 에어컨의 찬 바람에 오래 노출되었다. 여기에 피로가 겹치니 몸살감기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는 자가 진단이다. 한 달 넘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는 분이 이웃에 있다. 나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빨리 가라앉고 있다. 몸살이 시작되면 증세가 심해지다가 사나흘 뒤 정점을 찍고 서서히 사라진다. 내 경우는 통상 두 주 정도는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작 단계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길위의단상 2023.09.15

40년

40년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 후배 셋을 만났다. 우연히 한 사람과 통화가 되었고, 그를 통해 다른 둘과도 연결이 되었다. 마침 셋 모두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내가 먼저 만나보자고 했다. 우리는 1981년에 M중학교에 같이 발령을 받았다. 개설 학교인지라 신입생밖에 없어 교직원이 30명 정도 된 단촐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른다. 나는 두 번째 학교였지만 셋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첫 발령이었다. 싱그러웠던 20대의, 순수했던 꿈과 열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얼굴에서 중첩된 40년 세월의 아득함을 느꼈지만 옛 추억을 공유하면서 신기하게도 이내 그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40년의 긴 시간도 사람을 바꿀 수는 없는 듯했다. 내가 가졌던 ..

길위의단상 2023.09.01

도피하는 독서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

길위의단상 2023.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