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여행을 했던 것이 몇 년 전이었는지 가물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자주 데리고 다녔는데 크고 나니 함께 갈 일이 없어졌다. 우선 아이들이 아빠와 같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가 대략 사춘기 때부터였다. 내 기억으로는 아이들과의 마지막 여행이 첫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제부도에 간 것이 아니었나 싶다. 8 년 전이다. 그때 바닷가 뻘을 맨발로 걷다가 조개 껍질을 밟아 모두가 발바닥에 상채기가 생겼다.
이번에 첫째가 휴가를 얻으면서부모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고 해서 무척 반가웠다. 특히 아내가 제일 좋아했다. 갑자기 결정된 것이라 멀리 여행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고 전주 처갓집에 머물며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도 외할머니를 찾아뵙고 싶어했다.
첫째날은 내려가다가 아산 공세리성당에 들렀다. 공세리성당은 1922 년에 지은근대적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은 아니지만 고딕양식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공진창(貢津倉)이 있던 자리였다. 성당은 물론이고주변 환경도 아름답고 경건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의 오래된 느티나무를 보고 싶었다. 마침 주일 오전이라 성당 안에서 국악으로 미사 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성당에 얽힌 일화 하나가 있다. 옛날 '이명래 고약'의 개발자가 바로 공세리성당의 초대 신부님이였던 드비즈였다. 신부님은 당시 간척사업의 고된 노동으로 피부가 헌 사람들을 위해 한방약을 직접 조제했다고 한다. 뒤에 자신의 심부름꾼이었던 이명래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해 주어 그 이름이 '이명래 고약'으로 되었다. 어렸을 때 이 고약을 애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는 종기도 자주 생겼고, 그때마다 까만색의 고약을 바르면 깜쪽같이 고름이 빠져 나왔다.
다시 내려가다가 외암리 민속마을에 들렀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여기에 소풍을 온 것이 기억 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내나 아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력이 약한 나도 가끔씩은 이렇게 엉뚱한 것을생각해 낼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별로 신뢰할 게 못 된다. 수 많은 사실들 중 한 가지가 뇌리에 박히고 그것이 전체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런 것들이 오해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 마을은 약 500 년 전 예안 이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데 우리나라 전통 마을의 모습을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돌담이었다. 미로 같이 얽힌 곡선의 골목길과 돌담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그러나 햇볕이 따가워서 길게 걸어볼 수가 없었다.
다음은 마곡사를 찾았다. 마곡사는 아내와의 사이에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약혼을 하고 함께 여행을 하면서 들린 첫번 째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비포장길을 따라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왔었다. 그러나 예전에 묵었던 민박집은 철거되었고, 시설들은 아래쪽으로 옮겨져 새로 조성되었다. 옛 추억을 느껴보기에는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우리는 옛 추억에 잠겼지만, 아이는 아마 새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둘째날은 전주 시내 나들이를 했다. 점심은 한국식당에서 한정식으로 했는데 일인당 6000 원이라는 싼 값으로 맛있는 정식맛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뚝배기에 담긴 네 종류의 찌개가 맛있었다.
이번에는 전주의 유명한 맛집들을 찾아보기로 했었다. 그러나 한국식당 한 집밖에 가보지 못했다. 가고 싶었던 집들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 화순집(063-284-6630) ;오모가리탕, 4인분 7만원
- 화심순두부(063-231-6500) ; 순두부찌개백반, 4천원
- 성미당(063-287-8800) ; 육회비빔밥, 1만원
- 전주왱이콩나물국밥(063-287-6979 ; 콩나물국밥, 5천원
- Buy전주(063-222-7821) ; 전주막걸리, 한 주전자에 12000원
오후에는 전주 한옥거리와 경기전, 전동성당, 완산칠봉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내는 아이에게 여러가지를 구경시켜 주고 싶어헸으나 아이의 허리가 아파서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했으나 아내의 진단 결과가 걱정스럽게 나와 속으로는 많이 우울했다.
셋째날은 담양으로 갔다. 아이는 보성의 녹차밭을 제일 보고 싶어했으나 보성까지 왕복하기에는 무리여서 순창과 담양을 다녀오기로 했다. 날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차라리 다니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지나는 길에 순창 강천산에 들렀는데 나로서는 이번 여행에서가장 만족스런 곳이었다. 매표소에서 강천사로 이어지는 계곡과 산책길이 일품이었다. 특히 산책로는 부드러운 흙길로 되어 있어 아내와 아이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걷기에 좋은 흙길은 내가 경험한 곳 중에서는 이곳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군립공원치고는 관리도 무척 잘 되고 있었다.
계곡물 또한 맑은에메랄드빛이었다. 날씨가 궂어 물놀이하는 사람은 적었으나 저 물 속에 들어가 몸을 담근다는 것이 황공할 정도로 물은 맑고도 깨끗했다. 강천산은 산세나 계곡이 모두 아담하고 아름다운 산이었다. 이번에는 시간에 쫓겨 일부밖에 걷지 못했지만 언젠가 다시 내려와 제대로 등산을 해 보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입구의 병풍폭포에서 아이와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아이와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다. 내 탓이 크다. 아이가 마음을 여는 것을 느끼지만 난 아직 잘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산림욕로가 산을 따라 나무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이 길도 일부밖에 걷지 못해 아쉬웠지만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강천산은 다시 와 보고 싶은 매력 있는 산이다.
순창 고추장마을은 차로 슬쩍지나치며 보고, 담양으로 들어서며 메타세콰이어길을 구경했다. 아이가 사진을 찍겠다고 나가니 아내가 우산을 들고 따라간다. 보슬비여서 맞아도 괜찮게 보였지만 아내로서는 안스러웠는가 보다. 장모님과 나는 차에 남아서 저런 충성이 없다며 웃었다.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장된 유전자의 절대명령이다.
아이가 담양에서 대통밥을 사주기로 한 약속대로 점심은 대통밥정식으로 했다. 담양에 들어가기 직전의 국도변에 있는 '시골집밥상'이라는 음식점이었는데 유명 맛집인지 늦게까지도 손님이 이어졌다. 음식은 정갈하고 맛났다. 밖에서는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식사 후 셋은 죽림원으로 대나무 구경을 가고 나는 관방제림을 걸었다. 작년에 왔을 때 모르고 지나쳤는데 아이 때문에 1 년만에 다시 올 수 있어서 좋았다.수백 년 된 고목들이 제방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함양의 상림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나라 안에서는 자랑할 만한 숲이었다.
안내문에 보면 담양에는 소쇄원 등 정자나 옛 정원들이여럿 있다. 그중에서 이번에는 면앙정을 찾아 보았다. 면앙정은 중종 때에송순(宋純) 선생이 관직을 떠나 선비를 가르치며 여생들 보내던 정자로, 퇴계를 비롯해 학문에 대해 토론하던 장소였다. 작은 언덕 위에 세운 정자는 전망이 훤했고, 건물은 간소하고 소박했다.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서 멀리 떨쳐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로 시작되는 면앙정가를 이곳에서 지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백양사(白羊寺)에 들렀다. 오랫만에 함께 떠난 여행길,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백양사는 언제 찾아도 정갈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절이다.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이번 짧은 여행에서도 맑은 날과 흐린 날, 비 오는 날이 연달아 이어졌다. 하물며 수십 년의 긴 인생길에서 어찌 평탄한 삶만을 바랄 수 있으랴. 어떤 때는 벅찬 고갯길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나기를 만나 옷을 흠뻑 젖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기쁜 날보다는 슬프고 안타까웠던 날들이 더 많았다. 앞으로도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기를, 우리 모두가 고난을 통해 한 걸음씩 성장해 나가길 기원한다. 그리고 아이 또한 험한 인생길을 지혜롭게 헤쳐가기를....
돌아오는 차 안에서야 아내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