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인간과 사물의 기원

샌. 2012. 1. 9. 08:47

재미있는 책이다. <인간과 사물의 기원>이라는 제목만 보면 무거운 과학 서적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책 제목도 일부러 이렇게 비틀어 정한 것 같다. 지은이 김진송 씨의 기발한 상상력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지은이는 국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후 양평에 내려가 목수가 된 분이다. 최근에는 <상상목공소>라는 책을 펴냈다.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지식에 대한 냉소가 상쾌하다. 기존 관념을 혐오하면서 유머러스하게 비튼다. 거기에는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현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서의 세계로 보이지만 지은이에게 합리성과 이성은 질서를 위한 형식이며 억압일 뿐이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올바르다고 믿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로는 자신의 억압과 속박을 합리적인 질서로 위장한 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 진리는 허위와 오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책에는 '개와 의자의 기원' 등 24개의 주제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중 몇 개만 인용하면....

'비행기가 뜨는 힘'에서는 비행기를 띄우는 힘은 승객들의 염력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비행기가 뜨는 힘은 날개에서 생기는 양력이라고 배웠다. 베르누이의 원리에 의해 압력차가 생기고 비행기는 위쪽으로 힘을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적인 원리로 설명해도 고개가 갸웃해진다. 수백 명의 사람과 짐을 실은 쇳덩이를 어떻게 날개에서 생기는 힘만으로 띄울 수 있을까. 여기서 지은이는 비행기를 띄우는 힘은 양력이 아니라 승객과 승무원의 염원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비행기가 떠오르기 위해 가속하며 활주로를 달릴 때, 모든 승객과 승무원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하늘을 날아올라야 한다는 절실함이다. 그런 사람들의 욕구가 하나로 모여 엄청난 염력을 발생한다. 이 힘은 뇌를 통해 날개에 전해지고 비행기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원문명 시대 집단 주거지 유적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은 5천 년 뒤의 세상 이야기다. 미래의 인간이 지금 우리의 문명 유적을 발견한다. 전 지구적인 대폭발에 의하여 원문명은 멸망했다. 빙하기가 지나고 기온이 상승하면서 거대한 얼음덩이가 녹고 '세울로' 지역의 유적이 나타났다. 거대한 직사각형 구조물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무너져 있었다. 미래인은 유적지의 성격에 대해 무덤, 군사 시설, 감옥, 주거지 등 네 가지로 추정하며 조사한다. 여기서 '세울로'는 서울이고 구조물은 아파트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주거 형태로서의 아파트를 미래인들은 기이하게 느낀다. 동시에 지은이는 미래 사람들의 눈을 통해 우리의 소유 제도, 소비문화, 계급적 사회 구조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가상 공간의 부동산 투기'는 인터넷에 만들어진 가상 공간의 삶에 대한 얘기다. 스티브 잡스 같은 인터넷 천재가 실재와 흡사한 3D의 입체적인 가상 현실 공간을 만든다.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포털 사이트로 실제의 공간과 인터넷상의 공간이 일치되어 있다. 이 '사이버스(Cybearth)'는 대성공을 거두고 개발자는 엄청난 돈을 번다. 사람들은 사이버스를 통해 업무를 보고 모든 삶이 나중에는 실재 공간과 가상 공간과의 구분마저 모호해진다. 사람들은 땅을 팔아 가상 공간의 부동산 투기로 몰린다. 그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벌어지고 결국 몰락으로 이어진다. 지은이는 부동산 투기의 현실을 풍자하면서 사이버 공간의 미래도 암시하고 있다.

'강자 보호와 약자 처벌에 관한 법률'이 공표되었다. 사람들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로 색깔로 구분된 신분카드를 받는데, 세상은 강자에게 승복하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사회적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강보약처법은 지금 우리 사회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강자에게는 세제 지원, 금융 혜택, 행정 지원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약자로 분류된 농민들과 노동자, 중소기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중단되었다. 그 효과는 금방 드러나서 농가에서는 더 이상 아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허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중소기업의 파산이 속출했다. 반면 세제의 금융 혜택을 받아 엄청난 투자와 해외 마케팅에 주력한 기업들은 살아남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로 화려하게 등장했으며 세계적인 부호의 순위에 이름을 새긴 기업가가 속출했다.'

기존 관념을 깨뜨리는 지은이의 상상력이 신선하다. 책에는 냉소와 풍자, 비아냥거림이 공존하다. 합리적이고 질서있는 이 세계가 거짓과 오류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는 의문을 한 번 품어볼 만하다. 이 책은 체제 안에서 체제의 스타일대로 완고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두뇌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어 준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지은이는 이렇게 독설을 퍼붓는다.

"체제의 옹호자들, 질서의 노예들. 슬로건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과 캠페인을 벌이는 예술가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 예술가지. 세상에서 가장 경멸스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나? 나 말인가? 내가 소설을 쓰고 앉아 있다고? 그러고 보니 나도 슬로건을 만들기는 하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지껄이면서 더 말도 안 되는 현상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실을 극복하자!' 이게 나의 슬로건이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불필요하지만, 인간에 대한 혐오와 문명에 대한 냉소이지.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이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거지? 긍적적인 사고란 멀쩡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순에 눈을 감으려 드는 출세주의자들의 방편일 뿐이지. 도대체 이런 인간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냉소와 혐오 말고 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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